프리다 칼로
Viva la Vida, 인생 만세.
프리다 칼로의 작품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다. 여러 개의 수박이 화면에 가득 차게 그려져 있다. 반쪽짜리도, 4분의 1로 잘린 것도 있고 온전히 한 통으로 되어 있는 것, 껍질이 초록인 것, 노랗게 익은 것, 화려하게 모양내 잘린 수박까지 다양하다. 프리다 칼로는 세상을 떠나기 여드레 전, 이 그림을 그렸고 이것은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인생 만세라니, 엄청나게 행복한 삶을 살았을 거라고 추측하기 쉽지만 그녀의 삶에 전반적으로 일어난 많은 사건 사고들은 보통 사람들이 살면서 한 가지만 겪기도 어려울 법한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힘든 인생에 만세라고 찬탄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녀의 인생을 둘러보자.
1907년 멕시코에서 탄생한 그녀의 이름 프리다는 평화라는 뜻이다. 독일계였던 아버지는 스탈린주의자였고 어머니는 평화주의자였다. 여섯 살 되던 해에 소아마비를 앓았던 그녀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가졌다.
1922년 멕시코 최고의 명문 국립 예비학교에 입학했는데, 2000명의 학생 중 여학생은 35명에 불과했다. 멕시코 혁명의 여파가 이어지던 시대였기에 학생들은 지성과 논리를 동경했다. 카추차스라는 동호회에서 온갖 고전문학을 섭렵하며 다양한 언어를 익히기도 했다.
그러나 영리하고 열정적인 그녀는 의사가 되지 못하고 환자가 되고 말았다. 1925년 일어난 교통사고 때문이다. 그녀는 원래 다른 버스를 탈 예정이었으나 두고 온 양산을 찾으러 가느라 내렸다가 사고를 맞고 말았다. 전차와 버스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 강철봉이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를 뚫었다. 소아마비로 이미 불편했던 오른발은 그나마 뭉개져 버렸다. 이 사고는 프리다 칼로의 몸과 더불어 그녀 집안의 가산마저 산산조각 냈기에 학교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좌절은 그녀의 채우지 못한 욕망의 탈출구로 그림을 선택하게 했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그녀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는 계기가 된다. 그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사회운동가로도 유명했는데, 다짜고짜 찾아와 생계를 위한 작가가 될 만한 재능이 자신에게 존재하는지 묻는 프리다 칼로의 세 점의 그림을 보고 강렬한 인상을 받고 매혹되었다. 그는 그녀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계속해 나갈 것을 격려한다.
회복 기간을 거치고 나서 서 있기도 힘들었지만 프리다 칼로는 함께 공부했던 옛 친구들에 뒤지지 않도록,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더 많이 읽고 썼다.
그리고 이 무렵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부부가 된다. 그러나 디에고는 악명높은 여성 편력과 거친 언행, 오만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단점 또한 잘 알고 있었던 프리다의 결정은 아마도 사랑만으로 내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멕시코를 벗어나 인생의 목표가 같은 사람을 만나 성장하고 싶었던 그녀는 그 적임자로 디에고를 선택했던 것이다. 1930년 부부는 둘은 미국으로 향하고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다. 그녀는 예술사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걸작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의 결혼생활은 평범하지 않았는데, 프리다는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는 것을 즐겼고, 그들은 지성과 열정에 매료되었다. 디에고는 심한 여성 편력을 발휘하는 동시에 그녀에게 집착하다가 결국은 이혼을 강요했고, 이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재결합을 애원한다. 그리고 두 번째 결혼식이 이어진다. 프리다에게 동반자란 사랑보다는 작품에 대한 이해도가 척도였던 것 같다. 프라다에게 디에고는 양날의 검 같은 존재이지 않았을까.
프리다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고 1943년 라 에스메랄다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빠른 속도로 악화된다. 그녀의 몸과 마음을 이미 한번 부쉈던 사고는 후유증이라는 형태로 그녀를 잠식했다. 오른발은 염증으로 괴사하고 허리뼈의 통증은 날로 심해져 결국 오른발은 절단해야 했고 일곱 번의 척추 수술과 긴 병상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에도 통증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자기가 하고자 하는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반전 평화 운동에 서명으로 참여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프리다 칼로는 일생 22번의 외과수술을 받았다.
1953년 프리다 칼로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개막식에 참가한 프리다는 구급차로 전시장에 도착했고 침대에 누운 채 관람객을 맞았다고 한다. 그리고 1954년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녀의 인생에 걸쳐 일어난 끔찍한 사고는 그녀의 몸을 잠식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삼키지는 못했다. 그녀가 생전에 남긴 말들은 내게 많은 울림을 준다.
“나는 나만의 현실을 그린다.”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그림을 그린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내 의지는 강하다. 내 의지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인생 만세!”까지.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인생을 그토록 사랑하고 죽어가는 그 순간 아쉬움이 아닌 찬사를 남길 수 있었던 근원에는 포기를 모르는 끊임없는 도전과 용기 있는 직면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가 보아도 상황이 좋은 인생임에도 즐거움보다는 아쉬움이나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은 너무나 많다. 결국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 중심에 다가가고자 온 힘을 다하는 과정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일생과 작품을 통해 나에게 알려주었다.
프리다 칼로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당신의 인생은 최고였다고. 만세라고.
예술가 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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