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5 - 1-4세기 로마, 이집트, 인도, 기독교의 미술
초기의 로마가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는 동안 미술의 발전은 멈추어진 상태였다. 대부분의 예술가는 그리스인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력이 온 세계에 떨쳐지자 미술의 영역도 제자리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미술가들에게는 새로운 할 일들이 부여되고 그것들을 완수하기 위해서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하고 실행해야 했다. 로마인의 가장 위대한 유산은 토목공학이라고 할 수 있다. 도로, 수로, 공중목욕탕의 우수함은 지금의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하고 아직도 여전히 그것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로마를 찾고 있다.
대표적인 로마 건축물로 손꼽히는 콜로세움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투기장이었다. 거대한 원형의 건물은 계단형의 관람석을 가진 구조다. 층과 층의 지지대가 되어주는 아치들의 정면에는 그리스식의 칸막이벽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리스 신전에 사용된 세 가지 양식이 모두 사용되었다. 1층은 도리아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과 4층은 코린트 식이다. 로마의 토목 구조물에 그리스의 형식을 결합하여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과거와 다른 콜로세움의 새로운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그리스 건축에서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던 아치는, 로마 시대에 이르러 독립된 형태로 만든 쐐기 모양의 돌을 다듬어 아치를 건조해내는 토목공학 법을 이루어내는 업적을 세웠는데, 이 공법을 습득하고 발전시킨 건축가들은 건축의 많은 부분에 아치를 대담하게 적용하기 시작했다. 다리나 수로의 기둥을 아치로 연결하거나 둥근 천장을 만들어 내는 데도 사용했다. 현재까지도 로마의 위대한 건축물로 유명한 판테온 신전의 천장도 이런 기술력의 결과물이며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궁륭 형의 둥근 천장의 꼭대기에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구멍이 뚫려 있는 둥근 방은 감탄을 자아낸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에서 그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가져다가 자신들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 알맞게 변화시키고 적용했다. 그중 하나가 실물과 같은 초상의 제작이었다. 장례 행렬에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행진하는 것인데, 이는 고대 이집트의 영혼을 보존시켜주려는 믿음과 연결 지어 볼 수 있다. 로마가 제국이 되고 나서는 황제의 흉상은 종교에 못지않은 경외의 대상으로 제작되었지만 특이한 점은 이러한 초상을 제작하는 데에 과장이나 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절대권력을 시사하는 흉상들임에도 아첨 기라고는 눈 씻고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로마 미술가들의 또 다른 과제는 고대 오리엔트의 관습, 즉 전승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 전하는 것이었다. 트라야 누스 황제는 다키아, 지금의 로마니아에서 있었던 전쟁과 승리를 묘사한 연대기로서의 기둥을 건립했는데, 이런 작업의 목적은 전투 보고와 강대한 전투력의 과시를 위해 정확한 세부 묘사였으므로 아름다움이나 조화로움이 아닌 기록과 전달에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여러 세기 동안 헬레니즘 미술과 로마 미술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이집트인들은 여전히 죽은 사람의 신체를 미라로 만들어 보존했지만 이집트 양식의 형상 대신 그리스식으로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 생생함과 사실성은 매우 참신하고 현대적으로 보여 차별된다.
종교 미술에 새로운 미술의 방법을 응용했던 것은 인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야기를 풀어내고 영웅을 찬양하는 로마적 방식은 부처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방식으로도 사용되었다.
인도의 조각은 헬레니즘이 영향을 끼치기 훨씬 이전부터 개화한 상태였지만, 훗날 불교미술의 대표 격이 되는 부조로 표현된 불상은 헬레니즘의 영향이었다. 그리스와 로마 미술은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게 보여줌에 능했고, 인도는 부처의 형상과 이야기를 미술로 창조하는데 좋은 모델이 되었다.
이러한 종교의 시각화는 우상 숭배를 지양하는 유대교마저 사용했는데, 이는 신도를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구약성서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표현이 서툴고 조악한데 애초에 인물을 정교하고 실물처럼 그리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장면의 의미, 즉 신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꽤 유효했던 것 같다.
그리스의 미술은 기독교 미술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4세기의 최초의 그리스도상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후기의 수염이 난 모습이 아니라 젊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여기에 헬레니즘 미술의 영향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천국의 왕좌 위에 앉아있는 것을 표현한 디테일이다.
기독교 미술의 기원은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최초의 기념비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유대인의 회당에서 볼 수 있는 장면들은 회당을 꾸미기 위한 장식이 목적이 아니라 성서의 이야기를 시각화한 것이다. 기독교도들의 무덤인 카타콤베의 벽에 최초의 그려진 그림들도 이와 유사한 의도로 그려진 것이다. 기법들은 폼페이에서도 볼 수 있었던 헬레니즘 회화 방식을 품고 있지만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와 권능을 증명하고 신자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헬레니즘 미술과의 근본적인 차이일 수 있다. 그리스 시대의 미술가가 생생함을 표현하기 위해 모든 근육의 디테일과 효과적이고 극적인 자세를 상상하여 표현하는 것과 다르게 신앙과 구원을 보여주기 위해 세 동방박사의 페르시아 복식과 구원의 상징인 비둘기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간결히 그리면 그만이었다. 명확성과 단순성, 상징성이 충실한 모방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러한 단순화된 표현이 감동적인 경우가 있다.
그리스 미술의 세련미와 조화는 사라지고 카타콤베의 화가들처럼 거칠고 단순한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과거 번성했던 기술과 기법들의 비밀들은 전쟁과 폭동으로 유실되었지만 이것이 미술의 후퇴는 아니었다. 단순한 모사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효과를 찾기 위한 고민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4~5세기의 초상화에서 이 시대 미술가들의 추구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보여준다. 로마인들이라면 자신들의 황제를 놀랄 만큼 실물을 닮은 초상과 다른 이런 작품을 외면했을지도 모르지만 인물상들은 나름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다. 이 그림들은 특징을 더 과장하여 강조하는 방법으로 더욱 강렬하게 표현해내는 방법을 찾아낸 것 같다.
'즐거운 미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 미술사 8 -2-13세기 이슬람, 중국 미술 (0) | 2022.09.26 |
---|---|
서양 미술사 7 – 5-13세기 로마, 비잔티움 (0) | 2022.09.23 |
서양 미술사 5 -B.C 4세기~1세기 그리스 (0) | 2022.09.19 |
서양 미술사 4 - BC.7~5세기의 그리스 (0) | 2022.09.18 |
서양 미술사 3 - 이집트 2, 메소포타미아 미술 (0) | 2022.09.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