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BC.7-5세기)
이 시기의 그리스 미술은 선사시대의 크레타, 미케네의 미술을 의미한다.
크레타섬을 어느 종족이 지배했는지, 미케네 (그리스 본토)의 미술이 어디에서 근거하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기원전 1000년 즈음 유럽의 어느 공격적인 민족이 지정학적으로 접근이 쉽지 않은 그리스 반도와 소아시아 연안까지 들어와 원주민을 정복했다. 이러한 장기전에서 당시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은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통해서 엿볼 수 있다.
그들이 지배한 초기 몇백 년간의 미술은 거칠고 원시적이어서, 크레타 양식의 특징인 쾌활함과 자유로움을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이집트인들의 엄격함을 넘어설 만큼 경직된 것이었다. 단순한 기하학무늬, 엄격한 문양 등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배열하는 것을 좋아했고 이러한 성향은 초기 그리스 시대의 건축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스파르타인들의 기원이 되는 도리아 족의 신전을 살펴보면 불필요한 부분이 전혀 없어 보이는데, 초기의 신전들은 목재로 지어졌던 걸로 추정되며, 신상을 모시는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벽, 지붕을 지탱하는 안정적인 지주들로 이루어진 대략의 구조를 상상할 수 있다. BC. 600년가량 이런 양식은 목조에서 석조로 변화되기 시작한다. 나무로 만들어졌던 지주들은 대형의 석재 대들보를 받치는 원주들로 바뀌었지만 이러한 구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끼워서 맞추는 목재구조의 방식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초기 신전들은 매우 놀랍게도 간결하면서도 조화롭다. 원주의 모양을 중간 부분이 약간 부풀고 윗부분이 차츰 가늘어지는 형태로 육중하게 짓눌리는 느낌이 아닌 좀 더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을 준다. 이집트 문명처럼 압도적이지 않은데, 아마도 피통치자들을 노예로 부리고자 하는 신격화 된 지배자가 없었던 그리스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아테네는 그리스 도시 국가 중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미술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의 영향력뿐 아니라 미술사 전반에 걸쳐서 보아도 혁명적 의미를 보인다. 그들은 그들만의 미술 형태를 만들기 위해 애썼다. 선조들의 미술의 신성한 규칙을 본받으려고 노력했고, 이집트나 아시리아의 미술품들을 발판으로 여러 가지 표현을 습득했는데, 그 과정에서 그저 있는 것을 답습하는 것에 족하지 않고 스스로 여러 가지 응용을 시도했다. 처음에 이런 시도는 완벽히 성공하지는 못한 미흡함이 보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들만의 관점’을 갖고자 했다는 것이다. 모든 조각가는 ‘자신만의 시점’에서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를 찾고자 했다. 개성에 대한 목마름, 창조에 대한 욕구였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다. 이러한 활발한 시도들은 다양한 기법으로 결과물을 보였다. 끌로 파내는 방법이 생기고, 어떻게 해야 조각상을 더 역동적으로 보이는지, 입매와 눈매의 각도가 휘어지면 표정과 생기가 살아난다는 것 등 여러 가지를 알고 나누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
화가들도 마찬가지의 길을 택했다. 우리가 그리스의 회화를 엿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당시의 그릇에 그려진 그림들이다. 화병에 그림을 그려 넣는 것은 아테네의 주요 산업으로 발전했고 작업장의 장인들은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 못지않게 새로운 시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이 병 표면에 그린 그림들은 몸통의 옆면 시야는 앞면이었던 이집트의 방식에서 벗어났고 시점에 따라 신체의 일부를 생략하여 실제로 어떻게 보일지를 열심히 상상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고 이 과정에서 고대의 법칙이 무너지고 단축법을 발견해냈다. 단축법은 원근법과 같은 개념이지만 원근법이 건축이나 풍경 같은 공간에 대한 용어라면 단축법은 인체나 물체에 대한 개념이다. 이집트의 미술에서도 아시리아의 미술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새로운 화법은 사실상 고대미술의 끝이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유물을 모두 버리는 것은 아니었기에 이집트 미술의 장점이었던 명확한 윤곽을 여전히 지키려고 애썼고 균형 있는 구성을 지켜나가는 것으로부터 출발을 시작했다. 다만 과거의 것들이 완전무결하다는 편견을 거둬낸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형태와 단축법의 발견으로 시작된 위대한 혁명은 그리스 시민들의 탐구심을 자극했고 이러한 태도는 과학, 철학에 눈을 뜨고 연극이 신을 찬양하는 단계를 벗어나 인간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의 예술가들은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비단 미술가뿐 아니라 시인이나 철학자의 위치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이 도시 중심지에서 차지하는 몫은 엄청나게 확대되어 있었다. 비록 아직 멸시받지 않는 위치였다고 해도 노동자들도 정책에 참여할 수 있는 민주주의 도시국가였기 때문이다.
아테네 미술의 전성기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와 일치한다.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치고 아테네를 지켜낸 페리클래스의 통치 아래 전쟁 중 파괴된 것들을 다시 구축하기 시작했다. 불에 타버린 아크로폴리스의 신전들은 이전에 없던 화려함과 장엄함을 갖춘 대리석 신전으로 다시 탄생했고, 페리클래스는 이런 작업을 해 나갔던 동시대의 미술가들을 동등하고 공정하게 대우했다.
그러나 당시의 수작들은 많이 유실되었는데, 이러한 원인은 기독교의 우상숭배 금지의 영향 때문이다. 이전 메소포타미아의 우상들, 신상들을 표현한 미술품들은 그리스 시대에도 거의 그대로 적용되었고, 사람들은 그 앞에서 주문을 외우거나 기도하며 섬겼다. 이교도의 신상을 모두 부숴 없애는 것이 신앙적 의무를 다하는 일로 여겼던 기독교의 승리로 고대의 유명한 조각품들은 모두 수난을 당해야 했다. 현재 미술관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대부분 관광객과 수집가를 위해서나 저택이나 시설을 꾸미기 위한 장식을 위해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이라 유실된 당시의 조각품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가령 활기가 없이 차갑고 창백한 조각품이 아닌 문헌을 토대로 상상해 본 당시 거장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은 상아로 만든 피부에 금 갑옷, 값비싼 의상과 장신구, 화려한 채색과 색깔 있는 돌을 조각하여 만든 눈을 가진 무려 11미터의 목상과 목상의 투구에 새겨진 그리폰 조각, 방패 안쪽에 보석 눈을 가진 뱀 등의 무시무시하면서도 신비로운 모습을 상상해보라. 원시와 야만의 느낌을 그대로 가진 그 조각은 기독교인들에게 미신의 대상인 우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페이디아스의 위대한 작품들, 아테나 여신상이나 제우스상은 살아남지 못했지만 모셔져 있던 신전과 장식은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다.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라스 일화가 남아있는데 전체의 스토리를 단순하고도 명료하게 잘 표현되어 있어서 놀랍다.
그리스 미술은 인체에 대한 묘사가 많은데, 당시의 운동 대회들은 현재의 스포츠와 달리 전문 운동선수의 분야가 아니라 명문가 자제들의 무대였으며 종교적 믿음과 의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우승자는 신들의 축복을 받고 경외의 대상으로 추앙받았기에 그 영광스러운 은총의 징표를 기념하고 보존하고자 해서 소재로 많이 삼았다.
올림피아의 유적들은 청동제가 많아서 받침대는 발견되었지만, 조상 자체는 금속이 귀했던 중세에 철거되어 녹여서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델포이에서 발견된 전사의 두상은 로마의 복제품과는 매우 다르다. 대리석 복제품의 공허한 눈이나 청동제 복제품의 텅 비어 있는 눈과 다르게 채색된 돌로 만들어진 이 두상은 머리카락과 입술에 도금이 된 따뜻한 인상을 지니고 있다.
또 한 사람의 조각가 미론은 작품에서 박진감과 역동성을 가지고 있는데, 실상 이 자세를 실제로 해보면 현실에 반영시키기에는 어려운 자세이다. 그 원인은 이 작품에 이집트 미술의 전통이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있다. 앞모습과 옆모습을 함께 표현하고자 한 미론은 실제 모델에게 자신이 생각하기에 실감 나는 모습을 재현시켜 적용한 것이다. 과학적으로 이 자세로 원반을 던지는 것이 가능한가 혹은 효율적인가를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당시의 화가들이 단축법으로 공간을 정복해나간 것과 같이 미론은 움직이는 대상을 정복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으니까.
그리스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을 꼽자면 파르테논의 신전과 조각들이다. 그들은 짧은 시간 동안에도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재현해내는데 많은 해결책을 찾아냈고 능률적이고 능숙한 솜씨를 습득했다. 중첩된 인물과 동물의 묘사와 유연한 뼈와 근육의 구조,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깃털 장식이나 옷자락 등에서 그 성과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작품들은 능력을 과시하려는 과함이 보이지 않는다. 생생하고 활기찬 조각들이 신전을 벽을 따라 조화롭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전통에 기반한 새로운 파격의 적절하고 조화로운 결과물이다.
이러한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어째서 우리가 전통을 공부하는 자세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고민하는 자세가 모두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게 된다.
'즐거운 미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양 미술사 8 -2-13세기 이슬람, 중국 미술 (0) | 2022.09.26 |
---|---|
서양 미술사 7 – 5-13세기 로마, 비잔티움 (0) | 2022.09.23 |
서양 미술사 6 - 1- 4세기 로마, 이집트, 인도, 기독교의 미술 (0) | 2022.09.22 |
서양 미술사 5 -B.C 4세기~1세기 그리스 (0) | 2022.09.19 |
서양 미술사 3 - 이집트 2, 메소포타미아 미술 (0) | 2022.09.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