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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5 -B.C 4세기~1세기 그리스

by 즐거운담원 2022. 9. 19.

B.C. 4세기~1세기의 그리스

기원전 5세기 무렵의 100년 동안 혁명에 가까운 미술의 자유로운 각성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재능이 힘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했다. 비록 대우나 처우는 여전히 존중보다는 장인이나 직인으로 취급되었지만 그들의 영향력과 업적이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기능을 벗어나 예술 그 자체로의 가치로 차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예술가들의 작업을 유파별로 구분하게 하고 그 업적을 비교하는 쪽으로 흐르고 경쟁 구도가 펼쳐졌다. 당연히 여러 가지 양식이 발전적으로 사용된 유물들이 많이 발견된다. 


도리아식이었던 파르테논 신전 이후 아크로폴리스에는 이오니아식으로 건물이 세워졌다. 가장 대표적인 에레크테이온 신전은 축조의 기본은 도리아식에 근거하지만 전반적 외관과 특징들은 다르다. 원주 기둥들은 도리아식에 비해 좀 날렵한 형태로 바뀌고 기둥머리는 소용돌이 문양으로 장식되어 우아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우아함은 조각이나 회화에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승리의 여신 아테나를 위한 작은 신전은 인물상들이 손, 발, 머리 등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음에도 극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묘사하고 의상의 얇은 천마저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다. 단축법은 이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아무런 무리 없이 발휘할 수 있는 표현 방식이 되었다. 이렇게 긍정적인 그리스 미술의 발전과 변화는 높은 평판과 칭송을 얻게 되었으며 찬양과 비판이 오가는 관심의 중심이 되었다.


가장 위대한 미술가로 평가받는 프락시 텔레스의 작품을 살펴보면 2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고대 미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딱딱하고 경직된 느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신은 편안한 모습으로 기품을 펼치고 있어서 고대의 가르침을 녹여 넣은 가운데 근육과 골격을 상상할 수 있는 부드러운 피부와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표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프락시 텔레스의 프락시 텔레스의 이러한 걸작의 바탕에는 다른 예술가들의 시행착오가 밑바탕이 된다. 실재하지 않을 만큼 균형 잡힌 완벽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다 보니 모델의 모습에서 불만족스러운 부분을 생략하고 완벽에 가깝다고 생각되도록 미화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작위적인 작업은 작품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활력과 개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기도 했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거쳐오면서 많은 예술가가 끊임없이 노력했기에 프락시 텔레스의 시대에 이르러 예술들은 숨을 쉬듯 자연스럽고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지금 우리도 너무 잘 알고 있는 아폴로 벨베데레 상이나 밀로의 비너스상 역시 프락시 텔레스의 업적과 기법이 사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조각품들은 한가지 결점을 가진다. 표정이다. 더없이 아름다운 얼굴이지만 명확한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이후 이런 결점은 극복된다. 프락시 텔레스 이후의 세대, 즉 알렉산더 대왕 시대에 이르러서 아름다운 얼굴보다 개성적이고 개인적인 특징이 포착된 ‘인상’이 있는 얼굴 표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초상’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미술 분야로 발전한다. 


알렉산더의 제국 건설은 그리스 미술에서도 매우 유의미한 전환점이었다. 영토는 넓어져 몇 개의 작은 도시로 제한되었던 공간은 세계의 절반으로 확장되었다. 이 같은 물리적인 변화는 즉각적으로 모든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의 미술은 더 이상 그리스 미술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헬레니즘 미술이라고 명명된다. 


새로운 건축물도 많이 건조되었는데, 기존의 양식에 만족하지 못했기에 새로운 것을 갈망했다. 새로운 코린트 양식의 원주 모양은 더욱 화려하게 소용돌이 문양에 나무 잎사귀의 형상이 더해졌고 호화롭고 장대해졌다. 그리스 미술의 양식에 오리엔트 왕국들의 전통이 융합되었던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에 이른 그리스의 미술은 매우 장대해졌지만 기존에 가졌던 우아함과 조화로움, 품위가 사라졌다. 강렬하고 거친 극적 효과들을 선호했고, 강한 인상을 남기고자 했으며 실제로도 인상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대표작을 예로 들자면 라오콘 군상이 있다. 비르길리우스의 에 나오는 장면을 묘한 것인데 그 강렬함은 매우 압도적이다. 


이 시기부터 부자들은 미술작품을 수집하게 되었는데, 유명한 작품을 구할 수 없을 때는 모사품에도 엄청난 액수를 지불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조각가보다 화가 거장이 많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그 작품을 서적을 통해 상상해 볼 수밖에 없다. 작품의 주제는 더 이상 종교적 목적보다는 연극의 한 장면이나 이발소의 모습 같은 일상의 주제들로 바뀌었다. 이러한 것들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폼페이 유적이다. 부유한 시골 마을이었던 폼페이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다 덮여버렸지만 구석구석에 일부가 남아있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작은 시골 마을 도처에 가득하기에는 놀라운 솜씨를 자랑한다. 


현재의 회화에 포함될 수 있는 요소들이 폼페이의 벽화에서 발견된다. 정물화, 동물화, 풍경화도 보인다. 이전의 회화에서 전쟁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제외하면 풍경을 주제로 한 그림은 없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생활의 매력을 표현하려는 시도가 시작되었고 미술가들은 시골 생활의 즐거움을 나타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 당시 작가들은 원근법을 몰라서 실제로 그들의 그림에는 있을 수 없는 풍경들이 발견된다. 제대로 된 원근법이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은 이로부터 또 천여 년의 시간이 흐른 뒤가 된다. 

지금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그림의 기본이나 원리는 고대인, 혹은 그 이전의 인류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온 창작 의지로부터 자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돌이나 수정이 자라는 것처럼 아주 더디지만 끊임없이 성장해 왔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어떤 시도들도 보이지 않는 영향력이 되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감흥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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