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8 -2-13세기 이슬람, 중국 미술

by 즐거운담원 2022. 9. 26.

서양 미술사를 이야기하려면 필연적으로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의 정세를 살펴보아야 한다. 유럽인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종교미술에 있어 형상의 허용 문제를 다른 두 가지 대종교는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흥미로운 포인트다. 7~8세기 이전의 종교를 모두 뒤엎고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을 점령했던 마호메트교, 즉 이슬람교는 형상의 문제에 대해 기독교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했다. 형상, 즉 우상을 제작하는 것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쉽게 제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형상을 묘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문양과 형태를 통해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형상화했다. 아라베스크 장식이라고 하는 정교한 문양이 그 결과물이다. 오리엔트의 카펫을 보자. 풍부한 색채와 창의성, 구성력 전반에 걸린 균형과 조화는 대단하다. 결과적으로 미술가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던 구체적인 실물의 이미지를 선과 색채의 추상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마호메트의 엄격한 통제의 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후기로 가면서 일부 마호메트교 종파는 이 문제에 다소 허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종교 외의 분야에 있어서는 인물의 그림이나 도해를 허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14세기 페르시아나 마호메트교의 통치를 받았던 인도의 연애, 역사, 우화 등에 관한 삽화들은 미술가들이 문양의 디자인에만 집중해야 했던 탓에 솜씨를 습득하고 훈련하는 결과가 되었다. 15세기 페르시아의 작품들은 놀랄만한 완성도로 그것을 증명한다. 현실적 묘사도, 단축법도, 명암도, 인체구조에 대한 실질적인 표현도 없다. 사람과 풀과 나무는 마치 종이를 오려내어 완벽한 문양이 되도록 고르게 배치한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이러한 효과가 더 어울리기도 한다. 때로 실질적인 묘사보다 이런 방식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었다.
중국은 청동 주조의 기술에 매우 능했다. 고대의 청동 제기 중 일부는 기원전 천년 혹은 그 이상까지도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 외에 중국 미술의 기원에 대해 밝혀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중국의 회화나 조각은 이 청동 미술의 역사처럼 오래된 것은 아니다. 1세기 전후의 중국은 매장 풍습이 생겨났는데, 무덤 벽에 생활과 관습을 엿볼 수 있는 생생한 묘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런 점은 이집트의 것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에서 이른바 전형적인 중국의 미술이라 특정 지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집트 것에 비하면 부드러운 곡선으로 표현되어 있었는데 이런 면은 조각에 있어서도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뒤틀어진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굳건함을 잃지는 않는다.
중국의 사상가들은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그림을 계몽의 수단으로 쓴다는 면에서 그레고리우스 교황과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요순시대의 도덕적 모범을 그림책으로 그린 두루마리들은 중국 미술 특유의 위엄과 우아함이 잘 드러나 있고 동작이나 구도가 그 내용이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명확하고 간결하다. 딱딱하거나 경직된 면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물결치는 듯한 곡선에는 운동감과 활기가 가득하다.
그러나 중국 미술에 가장 큰 자극과 활기를 부여한 것은 불교가 준 영향이었다. 승려와 고행자들의 모습은 놀랄 만큼 생생하게 조각으로 형상화되었다. 귀, 입술, 뺨의 부드러운 곡선은 실제의 형태를 담고 있고 모든 요소가 제 자리에 적절히 자리 잡아 동떨어짐 없이 전체적으로 연결되면서도 박진감이 넘친다.
불교는 중국 미술에 단지 새로운 과제와 변화를 불러온 표면적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작업을 하는 미술가의 업적을 매우 존중하게 했는데, 유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유럽의 미술가들은 장인이나 직인 정도의 낮은 대우를 받았던 것과는 매우 다르다. 중국인들은 사상 최초로 화가의 작업을 비천하게 여기지 않고 영감을 사로잡힌 시인과 같은 지식인의 위치를 부여했다. 참선이란 오랜 시간 한 가지 진리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고 마음속의 모든 측면에서 탐구하는 일이었다. 동양인들에게 이런 일, 즉 도를 깨우치고자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정신적인 수련으로 여겨졌고 그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글자 하나, 물, 돌, 산과 같은 자연 하나하나에서 명상할 거리를 찾아내고 실천했다. 이런 면은 중세 기독교 미술이 전설이나 일화, 혹은 특정한 교리를 설명하고 가르치려 했던 것과는 다르게 명상을 실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불교에 귀의한 미술가들은 존경심을 가지고 산수를 그렸고, 그것은 깊은 사색의 소재로 삼기 위해서였다. 아름다운 상자에는 비단 두루마리가 들어있고 조용한 시간 그것을 꺼내어 펼쳐 보며 사색하는 것, 그것이 걸작으로 꼽히는 12~13세기 중국의 산수화가 그려진 의도였다. 그러나 서양인들에게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중국인들의 산수화는 직접 자연을 대면하고 그 장면을 담는 것이 아니었고 명상과 사색에 집중하면서 대가의 작품을 탐구하며 기술 하나하나를 습득하고 그 뒤에 산수를 유람하며 그 감상을 마음에 새겨두었다가 그 이미지를 화폭 위에 재구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이렇게 떠오르는 머릿속의 이미지를 붓과 멋을 통하여 단번에 옮겨 놓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림과 함께 몇 줄의 시를 써 내려가기도 했다. 중국인들은 있는 그대로를 모사하여 옮기는 것을 저급하고 유치하다고 여겼다. 미술가는 그가 느낀 감흥을 시각적 이미지로 녹여 넣고자 했고, 감상자는 그 감흥을 찾아내고자 했다. 구름 사이에 어렴풋이 드러난 산봉우리를 대담한 필치로 그려 넣은 작품에서 실물을 찾고자 한다면 작품을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 그림을 이해하려면 내가 화가가 되어 이 장엄한 산봉우리를 마주하고 화가가 느꼈을 경외심을 느껴보려고 노력한다면 중국인들이 추구한 미의식을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높은 정신적 가치에 초점을 맞춘 작품뿐 아니라, 친근한 주제를 직관적으로 그린 그림들도 있는데, 그 안에서 중국인들이 사랑한 곡선과 운동성, 탄탄한 균형이 잡혀 있어서 늘 걸어두고 보아도 질리지 않을 만큼 훌륭하다.

이러한 훌륭한 작품이 가진 절도, 자연소재를 단순화하여 독특한 세계관을 담는 방법들은 시간이 흘러감에 있어서 어떠한 유형으로 정해지고 고정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과거의 걸작들을 찬양한 나머지 얽매여 화가 자신의 영감을 표현하기를 겁내게 되었고, 추앙의 대상이 된 작품들을 답습하는 틀에 갇히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모방했던 일본의 회화는 높은 수준을 유지했지만 어려운 유희를 즐기는 것과 같은 꼴로 시들해지다가 18세기 서양의 문물과 접촉을 하며 참신한 주제로 폭이 넓어지고 거기에 익숙해진 방식을 적용하며 새롭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유럽의 미술에도 상호 영향을 주게 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