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대에 필요치 않았던 기독교 교회를 지어야 했다. 가장 큰 세력이 된 기독교의 교회는 이전에 존재하던 고대의 신전들과 그 성격이 매우 달랐고 모든 미술의 경향 또한 바뀌어야 했다. 고대의 신전은 신상이 모셔진 성소로 이루어지고 제사나 의식 등의 행사는 건물 밖 야외에서 진행되었던 것과 달리 기독교의 미사나 예배는 제단 위에서 사제가 진행했기 때문에 고전 시대에 재판장으로 이용하거나 시장으로 사용되던 집회소 또는 공회당이라는 의미의 ‘바실리카’를 교회로 쓰기 위해 건축하기 시작했고, ‘바실리카’라는 용어 자체가 이런 형태의 교회당을 의미하게 되었다.
바실리카를 장식하는 방향은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는데, 형상을 사용하는 문제에 있어서 격렬한 논쟁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우상 숭배를 경계하던 초기 기독교인들은 신의 집에 조각상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실물 같은 조각상을 만드는 것은 반대하면서도 회화에 대해서는 이견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로마 제국의 서부 지역, 라틴계 사람들은 성서 이야기를 표현한 회화가 신앙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6세기 말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러한 분쟁을 조정하기 위해 문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 성서의 이야기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효과적 수단이라고 설득했다.
가장 세력이 큰 종교 지도자의 회화에 대한 긍정적 발언은 대단한 파급을 가져왔고, 교회 미술에 회화는 큰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로마 미술의 설명조 이야기 방식을 그대로 따르던 방식은 점차 핵심에 집중하고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었다. 이탈리아 동부 해안의 라벤나에 있는 바실리카를 예로 들자면 오병이어의 기적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수없이 많은 사람을 그리는 화려하고 극적인 장면 표현 대신 풍부하고 심오한 색채를 돌과 유리 조각들로 짜 맞추어 만드는 모자이크로 표현되었다. 이 효과적인 생략과 강조, 풍부한 색채는 전혀 사실적이거나 자연스러울 리 없지만 무언가 성스러운 기적을 느끼게 해 준다. 긴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예수가 두 사도가 건네주는 빵과 고기를 받들어 올리는 장면이다. 관람객 모두에게 음식을 나누고자 하는 듯한 이 그림은 대면하는 순간에는 경직되고 엄격한 것처럼 보인다. 그간 발달해온 인물의 표정과 신체를 표현하는 방법은 배제되고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보이기도 하고 원시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의도에 의한 것이다. 모든 것을 명확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이집트 미술의 관념을 부활시켜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미 발달한 묘사의 방식들은 끊임없는 변화에 녹아들어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모든 형상을 우상으로 여기는 일파는 이러한 교황의 지배를 거부했고 우상파괴자론를 내세우며 반대하고 나섰다. 745년 그들이 권력을 잡으며 모든 종교 미술이 동로마 교회에서 금지된다.
이러한 관점에도 반발하는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어째서 눈에 보이는 형상에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형상 자체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을 통해 신과 성자들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반론을 펼쳤고 또다시 세력이 이들에게 기울어지자 미술사에는 엄청난 변화가 찾아온다. 교회의 미술은 더 이상 문맹자들을 위한 설명에 그치지 않고 초자연적인 신비함을 반영하고 경외를 불러일으켰다. 어린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 성모의 모습(icon)은 단지 아름다운 모자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오래된 전통의 틀 속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면에서 비잔틴의 미술은 이집트의 미술과 닮은 부분이 있었지만 엄격하게 전통을 고수한 그림 안에는 그리스 헬레니즘 미술이 자랑하는 묘사의 아름다움이 옷 주름, 얼굴, 제스처에 그대로 담겨있기도 하고 표현하고자 하는 관념들을 더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비잔틴 미술은 엄격하게 형식과 규칙을 지시했지만 그 안에서도 그 단순한 도해를 거대하고 장엄한 예술로 적절하게 이용했다.
번쩍이는 금빛 벽에서 보는 이를 내려다보는 그림 속의 모습들은 완벽한 성서의 이야기로 여겨졌고 동로마 교회의 세력이 미치는 다른 나라에서도 힘을 지니게 되었다.
운 좋게도 여러 차례 유럽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첫 유럽 여행은 보통의 배낭여행처럼 유레일패스를 끊고 밤낮으로 열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 여행이었고, 두 번째 여행은 49일간의 자동차 여행, 세 번째와 네 번째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는 도보 여행이었다.
첫 번째 여행은 열차 시간과 숙소 찾기에 여념이 없기도 했고 여행 서적을 따라 기차가 닿는 역 주변의 광장, 성당, 시청, 유명 박물관을 답습하느라 오히려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여행은 자동차를 이용했으니 역 주변을 벗어날 수 있어서 좀 더 자연스러운 유럽을 볼 수 있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여행은 한동안 붐이 일어났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프랑스 길과 북쪽 길을 각각 걸었다.
네 번의 여행 기간을 합치면 7~8개월 정도가 되는데, 멀리 떠나는 것과 연고가 없는 곳을 헤매고 다니는 데에 더 목적이 있었기에 그 긴 시간을 체류하면서도 늘 여행지에 관한 공부는 뒷전이었다. 그래서 사전 지식 없이 그 많은 유적과 문화재들을 그저 보기만 했다. 생각하면 좋은 기회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게 아니었나 싶어 아까운 생각이 들긴 한다. 그러나 뒤늦게 이렇게 미술사를 정리해보면서 그때 보았던 그 그림들과 조각들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이제라도 몰랐던 이야기를 깨닫게 되는데, 오래 알고 지내기만 하던 누군가의 속사정을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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