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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9 – 6-11세기 유럽

by 즐거운담원 2022. 9. 27.

종교 미술에서 일반인들을 교화하는 수단으로써의 형상의 유용함을 주장했던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칙령이 나왔던 1세기 이후의 시대, 즉 로마제국이 몰락한 이후의 시대는 암흑시대라는 불명예스러운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민족 대이동, 전쟁, 봉기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나아갈 길을 찾을 지혜를 잃었고, 고대의 세계가 몰락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제국들이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혼란 시대, 그 대략 500-1000년경은 길었고, 긴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500년가량의 긴 시간 동안 뚜렷하거나 통일된 양식은 나타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양식이 중구난방으로 갈등을 일으켰다. 이 갈등은 이 시대가 끝날 무렵에나 마무리되었다. 이 시대는 암흑의 시대였고 여러 민족과 계급들이 엄청난 차이를 보이며 뒤섞인 혼란의 시대였다. 이런 뒤죽박죽의 역사 속에서도 학문과 예술은 사랑받았고 도서관과 보관소에 보존되었다.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의 학식이 풍부하고 교육받은 수도자들과 성직자들은 권력의 지위에 올라 미술의 부활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시도는 번번이 실패했는데, 미술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진 북유럽의 침입자들, 고드족, 반달족, 색슨족, 바이킹족 등 여러 튜톤 종족들의 침략과 전쟁에 방해받았기 때문이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던 이들은 그들을 야만인이라 경멸했다. 그들의 행동은 야만적이었지만 그들은 나름의 미의식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정교한 금속 세공술을 가지고 있었고, 뛰어난 목공예가들이 솜씨를 발휘했다. 그들은 용과 새들이 복잡하게 얽힌 신비한 무늬를 선호했는데, 이런 문양들이 어디서부터 왔고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튜톤 종족의 미술관도 다른 종족들의 종교적 의도 즉 주술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다. 바이킹의 썰매와 배에는 용을 새긴 조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장식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고향의 항구에 들어가기 전에 땅의 정령이 놀라지 않도록 그런 형상들은 제거하는 율법이 있었다고 한다.
켈트족의 아일랜드와 색슨족의 잉글랜드에서는 수도승과 선교자들이 이러한 북유럽의 미술을 기독교 미술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는데, 7세기에서 8세기에 만들어진 몇몇 필사본을 보면 그 노력의 성공적인 결과물을 볼 수 있다. 에 실려있는 십자가를 살펴보면 용과 뱀들이 복잡하게 얽혀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이 복잡한 무늬는 혼란스러움이 아닌 대응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놀랍다.

그들이 그린 삽화 속에서는 더 놀라운 인물 묘사의 방식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인물이라기보다는 인간 형태로 이루어진 기묘한 무늬처럼 보인다. 옷 주름은 서로 얽힌 리본처럼, 머리카락과 귀는 소용돌이의 무늬로, 얼굴 전체를 가면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요소들은 마치 원시인들의 토착 미술을 보는 듯한 느낌인데, 기존의 문화에 새로운 문화가 흡수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융합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미술가들은 자신들의 전통으로부터 온 아름다운 무늬를 그려 넣었고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흐름을 불어넣었고, 새로운 방향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시류가 시작되어도 이전에 있었던 것들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로마 황제들의 후계를 자처했던 샤를 대제의 궁정에는 로마 공예의 전통이 굳건히 부활하였다. 서기 800년 그의 궁전 속 예배당 그림은 삼백년 전 유명했던 라벤나의 그림의 복사판 같았다.

지금의 미술가들에게 독창성이란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는 목적, 교회를 설계하거나 성서의 이야기를 묘사하는 것은 기존의 방식으로도 충분한데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다.
샤를 대제의 궁정에서 제작된 필사본 성서에는 복음서를 쓰고 있는 성 마태오의 모습이 묘사된 장면이 등장하는데, 아주 고전적 방식으로 그려져 있다. 옷자락의 표현, 명암과 색채로 충실하게 입체감이 드러나는 머리의 묘사는 매우 공들여 그려져 있다. 9세기에 발견되는 또 다른 필사본에도 초기 기독교부터 전해 내려온 방식 그대로 그려진 그림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장면을 다른 방식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서재에 조용히 않아 침착하게 글을 적어 내려가는 학자의 모습이 아니라, 신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적는 마태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부릅뜬 눈과 커다란 손, 배경과 옷 주름의 붓 자국, 이런 요소들은 격렬한 감동 속에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의도했을 것이다. 소용돌이 모양의 선들과 지그재그 형태의 주름은 앞서 이야기한 다른 종족의 영향이 스며들면서 나타난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이었다.

이집트인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대로 그렸고,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리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이때의 미술가들은 묘사와 창조를 목표에 둔 것이 아니라 내용과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다. 1000년경의 독일 힐데스하임 예배당 청동 문의 부조에는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꾸짖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은 불필요한 것은 하나도 없이 이야기하고자 바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다. 하느님은 아담을 가리키고, 아담은 이브를, 이브는 땅 위의 뱀을 가리키고 있다. 죄를 저지른 순서, 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리키고 있다.
이 시기의 모든 미술이 종교적인 목적으로만 창작된 것은 아니었다. 중세에는 교회뿐 아니라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이 생활하는 성들이 많이 건축되었고 그런 건축물에도 미술가들의 작품이 많이 장식되었지만, 비종교적인 미술품들이 중세미술에서 잊히는 것은 보존율 때문이었다. 개인 저택의 장식과 미술은 유행에 따라 제거되거나 교체되는 경우가 많았기에 보존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노르만의 정복을 표현한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보존되었다. 이 태피스트리는 고대 오리엔트와 로마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연대기의 형식이었다. 표현은 능숙하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지만 아주 간결한 수단으로 전달하고자 하는바, 중요하게 여긴 바를 중점적으로 묘사하여 한 편의 서사를 풀어놓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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