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과 동유럽의 미술은 한 가지 점에서 극심한 차이를 보인다. 동유럽의 양식이 수천년을 지속되어 오는 것과 달리 서유럽의 미술은 한시도 멈춤 없이 새로운 이념과 새로운 방안을 찾아 변화했다는 것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은 12세기를 넘기지 않았다. 둥근 천장을 올리고 새롭고 웅장한 조상을 배치하는데 성공하자마자 이런 양식은 구식이 되고 새로운 사조가 북부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바로 고딕 양식이다. 아치들 사이의 틈을 메꾸기 위해 자리잡았던 육중한 벽돌들이 치워지고 건물 전체를 지탱할 수 있는 석재의 골조를 세울 수 있는 기술이 생겼다. 무거운 석벽이 무용해지자 커다른 유리창을 끼울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오늘날의 온실과 비슷한 형태로 철골재 대신 돌과 유리로만 된 건물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구조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한 조직이 필요했고, 섬세한 계산과 그것을 실현할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다. 공학 기술상의 뛰어난 업적이었음에 이견을 가질 수 없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들이 주는 힘과 권세는 어떤 적으로부터도 지켜줄 수 있는 강력하고도 전투적인 느낌이었다고 한다면 고딕 양식의 교회는 신도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성당의 벽은 벽돌대신 색색의 유리가 끼워진 스테인드글라스로 바뀌고 기둥과 구조목, 창틀의 격자는 금빛으로 빛났는데 그것은 천국이 지상으로 내려온 듯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이 환상적인 건물들은 멀리 떨어져 그 외관을 보아도 영광스럽다. 잘 알려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의 정면은 완벽하게 그것을 보여준다. 현관과 창문의 배열이 명료하고 자연스러우며 우아하다.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건물임에도 그 무게에 짓눌리는 느낌 없이 눈앞에 떠오르는 것처럼 표현되었다.
현관 옆에 배치된 조각들도 경쾌하고 가뿐하다. 아를의 로마네스크 성당의 현관 옆면의 견고하고 묵직한 것과 다른 생생함이 살아있는 듯 하다. 바로 움직일 것 같은 성상의 옷자락 안에는 살아 숨 쉬는 육체의 양감이 느껴진다. 모든 조각이 특징과 상징을 드러내고 있어서 성서를 읽은 사람이라면 그 조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다.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십계명 석판과 청동 뱀이 감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모세 등을 상세히 보여주며 교회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현해냈고, 이는 매우 개성적이었다.
12세기 후반기의 건물로 알려진 샤르트르 대성당을 비롯한 새롭고 웅장한 성당들이 프랑스, 영국, 스페인, 독일 등지에 생겨났다. 이 작업을 진행한 건축가들은 기존의 기술에 자신들의 새로운 것을 더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스트라스부르의 고딕성당의 조각에서는 인물의 배치에 좌우대칭을 유지하면서도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얼굴에 생생한 표정이나 제스처를 풍부하게 표현했다. 이는 잊혀졌던 고전의 미술을 되찾아 무엇을 표현하는가를 넘어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대해 고심했다.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가 성당을 위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면 화가들의 업무는 필사본의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이 시기의 삽화들은 로마네스크 시대의 엄숙한 그림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건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물들의 감정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규칙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대성당의 시대로 알려진 13세기의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였다. 독일이나 영국에서 선풍적으로 받아들여진 프랑스의 양식이 이탈리아에서는 초반에는 그다지 호응이 없었고 13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교역의 중심지였던 대항구 피사에서 활동한 니콜라 피사노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니콜라 피사노는 한 세대 전에 활동했던 거장들처럼 위엄 있고 실감이 나는 고대의 방법을 채택하고 작업했다.
이탈리아의 화가들은 조각가들보다 더디게 고딕 양식에 호응했다. 베네치아와 같은 상업도시들은 비잔틴 제국과 긴밀한 접촉을 가졌고 프랑스보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을 받았다. 13세기 이탈리아 교회의 모자이크들은 그리스 풍의 장중한 느낌이었다.
이러한 보수적인 양식에 대한 집착은 변화를 지연되게 만들었지만 13세기 말이 되자 비잔틴 전통의 확고한 바탕은 이탈리아 미술이 알프스 이북의 업적을 따라잡는 것은 물론 회화를 혁신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미술의 발전과 변화는 화가에 비해 조각가들이 더 빨리 받아들이기 쉬웠다. 2차원에 작업하는 화가들은 입체감을 표현하기 위해 단축법이나 명암을 통해 공간과 깊이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지만 조각가들은 현실의 공간과 빛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스트라스부르나 나움부르크에서 활동했던 조각가들의 작품 수준은 동시대의 회화가 따를 수 없는 박진감이 있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이러한 조각과 회화의 장벽을 허물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이었다. 비잔틴 미술은 암흑시대 서유럽의 필사본보다 더 많이 보존되었고, 그 그림들에는 헬레니즘 화가들의 업적이 그대로 남겨져이 있었다. 단축법과 명암법의 훌륭한 선례들이 알려주는 방법의 토대위에 피렌체의 천재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가 등장한다.
지오토는 미술사 책에서 늘 새로운 장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미술의 신기원이 그와 함께 시작했다고 확신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파도바의 교회의 프레스코다. 벽의 석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넣는 방식이다. 지오토가 그린 이 그림은 환조라 착각할만큼 입체적이고 생기 넘치는 회화로 팔의 원근법, 얼굴과 목의 입체적 표현과, 흐르는 듯한 옷의 주름 등이 이를 잘 보여준다. 과거의 자료를 참고하거나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이미 불충분했다. 지오토는 표현하고자 하는 장면을 마음 속에 떠올리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이런 장면에서 주인공은 어떻게 행동하고 움직일 것이고 그런 움직임은 우리에게 어떻게 보일 것인가.
지오토의 그림은 무대 위에서 진행되고 있는 실제의 장면을 보고 있는 느낌을 준다. 인물과 인물간의 공간과 움직임이 모두 자연스럽고 실제로 가능하도록 안배되어 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물의 슬픔마저 다 느낄 수 있을 만큼 모든 감정이 실감 나게 반영되었다.
지오토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고 피렌체의 자랑이 되었는데, 늘 장인이나 직인으로 하대 받았던 미술가의 처우가 예술가로서 존중과 존경의 대상이 된 것은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지오토의 등장은 미술사에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되는 시점이 되었다.
예술가가 노력을 인정받고 존경받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지오토 이전, 이름이 높여지지 않은 선배예술가님들에게 존경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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