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은 영국을 정복했고, 이 연도는 미술사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기준점이 된다. 색슨 시대의 건물 중 완전히 보존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잉글랜드에 상륙한 노르만인들은 노르망디와 그 외의 지방에서 발전된 건축 양식을 잉글랜드로 들여왔고 새로운 권력자가 된 사제들과 귀족들은 힘을 과시하기 위해 새로운 수도원과 예배당을 설립했다. 이러한 건축물들의 양식을 영국에서는 노르만 양식,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렸고, 이후 100년 이상 번성을 누렸다.
당시의 작은 마을에서는 교회가 유일한 석조건물이었다. 교회의 첨탑은 멀리서 보이는 이정표의 역할을 했고 사람들이 주일마다 만나는 장소였으며 그림과 조각으로 장식되어 원시적이고 소박한 사람들의 삶의 장소와 대조되는, 자랑스럽고 위엄 넘치는 장소였다.
암흑시대로 사회가 붕괴되었어도 문화를 송두리째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초기 예배당이나 바실리카, 그 외에 건축물을 짓던 양식들은 감실과 성가대석을 아우르는 기본 평면 형식의 기둥들에 그대로 남았다. 그런데도 노르만, 로마네스크의 교회들은 분위기는 옛 바실리카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육중하고 장식이나 창문도 별로 없다. 중세의 성채를 떠오르게 하는 벽과 탑들이 보이며 이교도적 생활방식을 벗어난 강력하고 도전적인 느낌의 석조건물들은 전투적인 느낌마저 준다.
이전의 바실리카에는 흔히 목재 지붕이 사용되었는데, 돌기둥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벼운 목재의 지붕은 위엄이 부족했고 화재에 취약했다. 모든 건축가는 이 거대한 건축물에 석재로 만들어진 둥근 지붕, 즉 궁륭을 올리는 일에 고민하고 몰두했다. 로마의 기술들은 대부분 잊힌 상태였기에 11~12세기 동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방법도 재료도 마땅치 않다는 결론에 이르러 노르만 건축가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지붕 전체를 그렇게 육중하게 만드는 것이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가로지르는 늑재를 서로 엇갈리게 걸치고 그사이에 삼각형의 틈을 메꾸는 식의 구조물들을 고안해나갔는데 이것은 일대 혁명을 불러왔다.
로마네스크 교회들이 조각으로 장식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에서였다. 장식이라는 개념은 종교의 관점에서 오해와 갈등을 불러일으키기 쉬웠기에, 모든 장식의 요소들은 교회의 가르침에 합당한 뚜렷한 관념을 표현하는 것이어야만 했다. 12세기 아를 지역의 성 트로핌 교회당에는 이 양식의 가장 완전한 예의 하나로 꼽힌다. 팀파눔이라고 불리는 현관 대들보 윗부분에는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의 4대 복음서 저자의 상징인 각각 사자, 천사, 황소, 독수리 가운데 둘러싸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장면들이 교회당의 출입구에 적절한 주제라고 생각했다. 대들보 아래에는 십이사도의 좌상과 그리스도, 그 좌측에는 지옥으로 끌려가는 영혼과 우측에는 천국에 속한 사람들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상징으로 표시된 성자의 근엄한 모습이 표시되어 있어서 신도들을 향한 교회의 가르침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그러한 표상들은 설교보다 더 오래, 인상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이러한 조각들은 고전의 작품들이 자연스럽고 우아하고 경쾌한 아름다움을 지녔던 것과 다르게 육중함과 엄숙함으로 인해 깊은 인상을 남겼고 마찬가지로 웅장한 건축물들과 잘 어울렸다.
교회 안의 회화나 소품 등의 모든 부분은 그 목적과 의미를 세심하게 담고 있었다.
1110년 무렵 글로스터 성당의 촛대는 괴물과 용이 서로 얽혀 있는 가운데 복음서 저자들의 상징과 인간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괴물이 등장하는 이 작품은 암흑시대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무서운 장면일 수 있지만, 이 싸움은 가망 없고 절망적인 싸움이 아님을 그림과 함께 새겨진 라틴어의 문구에서 알 수 있다. “이 빛을 담는 그릇은 덕의 일이요, 빛을 발함으로써 그 빛이 인간이 악에 어두워지지 않도록 교리를 설교한다.”
1113년 무렵 만들어진 벨기에 리에주에 있는 교회의 놋쇠 세례반을 살펴보면, 세례의 의식에 알맞는 그리스도의 세례 장면이 양각으로 표현되어 있고, 모든 인물과 동물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라틴어 문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그리스도나 천사, 성 요한의 모습을 표현하는 이 미술가의 작품은 자연스럽고 조용하면서도 장엄하다. 십자군의 시대였던 12세기에는 그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많았기에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당들의 영향을 받았던 걸로 보인다. 서유럽 미술이 동방 미술의 이러한 경향에 이렇게 밀접하게 접근했던 적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번창했던 이 시기뿐이었다. 조각이나 건축뿐 아니라 많은 삽화가 실려있는 수많은 필사본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수태고지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는 자연스럽고 생생한 실제적인 묘사가 아닌 마치 이집트의 부조를 보는 것과 같이 경직된 장면들이 펼쳐진다. 정면을 향하고 있는 성처녀 마리아는 놀라움에 손을 쳐들고 있고,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를 그린 시점은 윗면으로 그려져 있다. 작가는 실제와 같은 장면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성스러운 상징을 적절히 배치하여 내용을 전달하는 데 집중했다.
이 시대의 미술가들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묘사하려는 야심을 버렸고, 이러한 시도는 또 다른 가능성을 펼치게 해 주었는데, 당시의 독일 수도원에서 제작된 달력을 보면 그 성과를 알 수 있다. 수도원의 달력에는 달마다 기념해야 하는 성자들의 축일을 표시하는 글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상세한 재현으로 그린다면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들을 실감 나는 묘사나 극적인 장면 없이도 모두 전달한다. 이 시기의 회화는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이 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색채 또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미술가들은 직접적으로 보이는 실제의 음영과 농담을 모방해야 한다는 부담 없이 좋아하는 어떤 색채라도 자유롭게 선택해 그림으로 그렸다. 장신구, 서적의 삽화들, 스테인드글라스에 드러나는 강렬하고 자유로운 색감은 미술가들이 자연으로부터 벗어나소, 모방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초자연적 세계관을 전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고 요약하는 것으로 미술사를 보는 것은 수박의 겉을 핥는 것이나 눈을 감고 코끼리를 더듬어 파악하려는 것보다도 더 미흡한 시도일 거라고 생각 한다. 책 한 권을 읽고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더없이 미미한 시도라는 것을 알지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고, 거기에 따라서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겨지는 방법을 채택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 피어있는 꽃을 꺾어 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애써 가꾼 화단의 꽃을 모두 베어버리는 것처럼. 그러나 어떤 것이 자리 잡았던 흙에는 이미 그 흔적이 남는다. 뿌린 한 가닥, 씨앗 한 알처럼. 없앴다고 해서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미술의 역사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든 주변 환경에 떠밀려 움직이든, 사람은 그 안에서 자신의 방향을 찾고자 하고 찾은 방향대로 가기 위해 방법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성격이나 습관 생각을 바꾸는 일은 많지만 한번 몸과 마음에 자리 잡은 것이 완전히 소멸되는 일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때때로 내가 잃어버린 것들에 아쉬움을 느낀다. 미움을 알기 전의 순수나, 무지를 알기 전의 자신감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것들이 완벽한 것들이 아님을 알지만 가끔은 그런 것들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지금 내게 익숙해져 있는 것들 중 어떤 것들이 후회스러운 순간들도 있기도 하다. 하지만 길고 긴 시선으로 본다면, 이것은 모두 역사의 한 부분이고 다시 무엇으로 꽃을 피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을 그려가는 화가처럼, 조각을 새기는 조각가처럼 지금 내가 새기고 싶은 것을 새겨나가기 위해 열중하는 그 행위와 노력이 전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지금 내가 만들고 있는 순간이 내 삶의 마지막 장면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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