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Renaissance), 재생, 또는 부활이라는 의미, 즉 옛것이 새로이 살아난다는 관념을 지오토의 시대 이래로 이탈리아 전역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대에 예술가를 칭찬할 때 ‘마치 고대의 작품처럼 훌륭하다 ‘는 표현을 쓰곤 했었다. 이런 관념이 이탈리아에서 성행했던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먼 옛날 로마는 문명 세계의 중심이었고 로마는 이탈리아의 수도였다.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붕괴되고 퇴색한 영광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대했던 로마를 그리워 하는 마음은 고전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다. 고전시대와 그들이 희망하는 부흥의 시대 사이의 시간은 그저 서글픈 막간, 즉 중간 시대일 뿐이었다. 중세라는 이름으로 아직까지 사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탈리아인들은 고드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몰락했다고 여겼고 아름다운 것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행위를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 지칭하는 것이나 중세 미술을 야만을 뜻하는 고딕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은 같은 맥락일 수 있다.
미술의 재생, 르네상스의 시기는 암흑시대 이후 서서히 진행되다가 고딕시대에 이르러 급속도로 이루어진다. 중세 시대 중에 이탈리아는 다른 민족에 비해 낙후된 상태였고 오히려 미술의 발전과 전개를 인식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지오토의 업적은 혁신이었고 위대하고 고상한 미술의 부활이라고 여겼다. 14세기 이탈리아인들은 북부유럽의 야만인들로부터 파괴되었던 문화를 다시 부흥시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았다.
부유한 상업도시였던 피렌체에서는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자신감과 희망이 넘쳐흘렀다. 바로 이 피렌체에서 15세기 초 한 무리의 미술가들이 계획적으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고 과거의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감행한다.
그 젊은 미술가들의 지도자 필립포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가였다. 그는 피렌체 성당을 완성시키는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고딕 성당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양식은 배제하고 로마의 영광의 부활을 희망하는 사람들의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조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고대의 건물들을 그대로 모방할 의도는 아니었다. 15세기 피렌체의 요구와 안목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건축방식을 창조하여 고전적 건축의 형들과 새로운 조화를 어우러지도록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브루넬레스키는 그의 방침과 의도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그후 거의 오백 년 가까이 유럽과 미국의 건축가들은 그 뒤를 따랐다. 오늘날 어떤 도시나 마을에서 만날 수 있는 열주나 박공 같은 고전 형식이 그 흔적이다. 일부 건축가들이 브루넬레스키의 방침에 이견을 갖기 시작하고 르네상스식의 양식에 대해 반기를 든 것은 불과 한 세대 전부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지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주택들의 문과 창틀의 장식의 형태 속에 그 잔재가 남아있다. 브루넬레스키의 시도는 성공이었던 것이다.
그가 건축한 파찌가의 작은 예배당은 고전 시대의 신전과 겹치는 부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딕 건축가들이 사용했던 형식은 더더욱 없었다. 그가 고안한 구조들과 디테일은 그가 얼마나 주의 깊게 고대의 유적들을 연구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밝고 비례가 잘 잡혀 있는 실내는 높은 창문, 가느다란 기둥은 찾아 볼 수 없다.
브루넬레스키는 단지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 자만으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미술의 영역에 있어서 또 하나의 위대하고도 지배적인 발견, 원근법의 발견은 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여진다. 단축법을 썼던 그리스인이나 공간의 깊이를 표시하는데 능숙했던 헬레니즘기의 미술가들도 멀리 떨어진 물체가 수학적 법칙에 따라 크기가 작아진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고전 시대의 어떤 미술가도 지평선의 한 점에서 늘어선 가로스가 소실된다는 것을 그려내진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수학적 수단을 제공한 것이 브루넬레스키였다.
이 수학적 법칙에 의거해서 그려진 첫 번째 그림 중 하나가 마사치오의 예배당 벽화이다. 스물 여덟살을 채 넘기지 못하고 요절한 천재였던 그가 남긴 이 그림에는 원근법이라는 기법적 트릭뿐 아니라 극적인 장엄함을 표현해낸 효과였다. 단순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다부지고 모난 형태의 인물들을 원근법적인 틀 안에 배치함으로 마치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자아냈다.
브루넬레스키의 동료들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 도나텔로는 성 게오르기우스의 조각상을 제작했다. 피렌체의 오르 산 미켈레 교회당의 벽감 속에 세워두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딕의 조상들과 비교해 본다면 얼마나 극명하게 다른지 알아차릴 수 있다. 고딕의 조각상들은 현관 양쪽에 열을 지어 허공에 자리잡고 있어 다른 세상의 존재처럼 보이지만, 도나텔로의 성 게오르기우스는 굳건히 따을 딛고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듯 표현되었다. 중세 성자들의 고요한 아름다움 대신 무엇으로부터도 지켜낼 수 있을 듯한 저돌성과 용기를 탁월하게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마사치오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점잖은 세련미가 아닌 자연에 대한 참신하고 힘 있는 관찰을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아름답게 미화된 것이 아닌 인체의 진실한 탐구의 결과였던 것이다. 그들은 작업 실에 모델을 고용하고 원하는 자세를 취하도록 하고 공부해나가기 시작했다.
도나텔로는 지오토 못지 않은 큰 명성을 얻고 피렌체 외의 다른 도시로 초빙되어 그 도시를 빛낼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1427년 시에나의 세례반의 청동 부조를 조각했는데,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 얻어내는 살로메의 장면을 보여준다. 도나텔로의 이 작품은 모든 면이 다 새롭다. 깔끔하게 서술하려는 의도는 없고, 현장의 혼란을 전달하려는 욕구가 엿보인다. 거칠고 모진 형태의 인물들의 동작은 격렬하고, 중화시키지 않은 잔혹함이 당황스러울 만큼 생생하다.
원근감은 이전에 없던 박진감과 현실감을 안겨주었다. 도나텔로는 브루넬레스키와 마찬가지로 고전 미술을 재생시키기 위해 로마의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했지만,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르네상의 직접적 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브루넬레스키와 그 동료들은 미술의 부흥을 너무나 열정적으로 갈망했고 이러한 갈망은 고대의 유물뿐 아니라 자연과 과학에 눈을 돌렸던 것이 큰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피렌체에 도나텔로가 새로운 창조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과 같이 알프스 이북의 클라우스 슬루테르 역시 이전의 미술보다 더 실감 나고 솔직한 미술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가 만든 조각상들은 고딕 성당 현관 옆에 서있는 조각들과 다른 모습이다. 이 조각들은 실물을 모델로 한 조상같기보다는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인상적인 예술 감각을 지니고 있다.
북유럽에서 현실데 대한 탐구를 더 적극적으로 했던 화가가 있다. 얀 반 아이크다. 그는 현재 벨기에라고 불리는 지방에서 작업했다. 그는 겐트시의 거대한 제단화를 그의 형 휴베르트와 함께 완성했다고 알려져 있다.그의 제단화는 고딕 양식의 전통을 공공연히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방법을 완성해 더욱 완벽하게 만드는 것으로 중세 미술의 이념을 넘어섰다. 자연에 대한 관철은 끈기 있고 세부에 대한 지식은 정확했으며 현실의 나무와 도시의 지평선, 멀리 보이는 성에 이르는 실제의 풍경을 보여준다. 인물도 세세한 부분까지 정확하게 묘사하여 의복의 모피 장식의 털 마저 셀 수 있을 것 같다. 말과 같은 동물도 살아있는 듯 둥근 근육의 양감이 표현되어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그 동료들이 과학적 정확성으로 원근법을 적용하고 해부학을 기반으로 단축법을 적용해 인체를 그려나가는 것과 달리 만 아이크는 그림의 전체를 거울처럼 끈기 있게 그려내서 박진감을 이루어냈다. 북유럽 미술과 이탈리아 미술은 이런 측면에서 차이점을 보여 왔다.
반 아이크는 유화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지금처럼 튜브에 든 기성 물감이 없던 그 시절에는 색채를 띄는 풀이나 광물질로부터 직접 안료를 마련하고 빻거나 용매를 첨가하여 반죽으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 과정에 여러가지 재료가 사용되긴 했지만 용매의 주된 성분으로 달걀이 많이 쓰였다. 빨리 말라버린다는 것 이외엔 매우 적당한 방법으로 여겨진 이 방식으로 그리는 그림을 템페라라고 불렀다. 그러나 반 아이크는 이러한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기름을 써서 천천히 정확하게 색상과 질감을 표현하고 마지막에 밝은 색으로 하이라이트를 찍어 넣는 기법으로 생기를 극대화했다.반 아이크의 예술은 초상화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업적을 드러냈다. 반 아이크의 ‘아르놀피니의 약혼’이라는 초상을 보면 그 안에 주인공뿐 아니라 거울 속에 비친 방의 정경과 그림을 그리고 있는 반 아이크가 보이고 라틴어로 그가 그 자리에 있었노라는 라틴어가 쓰여있다. 이런 방식은 어떤 순간을 보증하는 증인을 내세우는 공증의 방식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이러한 혁신적 미술가 중 가장 급진적인 사람의 하나로 스위스의 콘라드 비츠를 들 수 있는데, 그가 1444년 제네바시를 위해 그린 제단화에는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그는 물 위를 걷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제네바의 사람들이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길 원했기에, 그들이 모두 다 잘 알고 있는 제네바 호수를 배경으로 그려넣었다. 아마도 그것은 형실의 광경을 최초로 정확하게 묘사하려고 시도한 작품일 것이다. 그 주변에 그려진 어부들은 위엄 있는 사도가 아니라 평범한 어부들의 모습이다. 성 베드로는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소란 속, 파도위에 굳건히 서있다. 친숙하게 알고 있는 호수 위를 걸으며 두려워 말라는 말씀을 건네는 광경에 제네바의 사람들이 이전에 없던 감동을 느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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