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14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1)

by 즐거운담원 2022. 10. 4.

15세기 초반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미술의 새로운 발견은 새로운 바람이 되어 전 유럽을 휩쓸었다. 감동적으로 종교를 설명하는 도구로 쓰였던 미술은 현실 세계,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미술가들은 실험과 탐구의 영역에 빠져들었고 이러한 모험정신은 중세 시대의 막을 내리는 커다란 힘이었다.

새로운 시대의 바람은 미술의 영역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학문과 정치도 이 바람을 피하지는 못했다. 중세의 학자들은 모두 라틴어로 쓰고 말할 줄 알았고 유럽의 어느 나라나 대학에서는 라틴어로 가르치고 배웠다. 중세의 귀족들은 기사도의 이상을 바탕으로 그들이 섬기는 왕이나 군주에 대한 충성하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이르며, 영주의 성이 아닌 시민과 상인의 도시가 중심지로 변화하고 상인들은 라틴어가 아닌 각자의 자국어로 대화했다. 교역과 산업에 있어서 자신들의 특권을 내세우고 지키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중세의 미술 거장들은 명성이 있다면 어디에서나 일할 수 있었지만, 도시가 중요해지자 모든 공예가나 장인들이 동업조합, 즉 길드(guild)를 조직해서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길드는 현재의 노동조합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들은 안전한 시장확보다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파업을 하기도 했다. 길드에 가입하려면 미술가들은 자신의 기술을 증명해야 했고, 가입한 후에는 공방을 열고 제자를 고용하고 작업을 주문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길드와 법인은 시의 행정에 대해 발언권을 가진, 시의 번창을 위해 도움을 주는 부유한 회사였다. 피렌체 및 다른 도시의 길드들, 대장장이, 모직업자, 피혁공예가 등은 그들의 수익 일부를 교회나 조합건물, 제단,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에 헌금의 형식으로 후원을 했다. 그리고 길드의 회원들을 보호하고 다른 지방에서 오는 미술가의 정착이나 유입을 막았다. 아주 뛰어나고 유명한 작가 몇을 제외하면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일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는 미술의 역사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딕 국제 양식은 최후의 국제적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이 서로 오가지 않게 되면서 15세기의 미술은 각기 다른 유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을 비롯한 모든 도시나 마을에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누군가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길드의 우두머리, 즉 길드 마스터를 찾아가 도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잔심부름에서 시작하여 쓸모있는 일꾼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스승의 그림 준비를 돕다가 작은 작업들을 나누어 맡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성과를 보이면 점차 중요한 업무를 부여받게 되는 수순 있었다.이러한 것이 15세기의 ‘회화 학교’였던 것이다. 이러한 학교들은 매우 독자적인 개성이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한사람의 우두머리의 방식을 철저하게 전수받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를 보면 어느 유파의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유파들이 해나갔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는 당시의 피렌체 미술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새로운 문을 열었던 브루넬레스키, 도나텔로, 마시치오의 뒤를 이은 두 번째 세대는 그들이 발견하고 창안해 낸 것들을 최대로 활용하여 그들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 고심했다. 전통적인 주문에 새롭고 혁명적인 방법들을 적용하려는 시도에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도 생겼지만 이를 절충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예를 들면 알베르티가 건축한 루첼 라이가의 궁전이다. 전통적인 맥락 속에서 고전적 주식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적절하게 번안해냈다. 알베르티와 같은 건축가 더불어 15세기의 화가와 조각가들 역시 옛 전통에 새로운 방식을 조화시켜내야만 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고딕 전통과 근대적 형식 사이의 절충, 이것이 바로 15세기 중반 미술의 특징이다.

이러한 조화와 절충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로 피렌체의 로렌초 기베르티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로 그의 작품에는 14세기 미술가들의 세삼한 묘사와 더불어 도나텔로의 작품과 같은 힘찬 박진감이 느껴진다.

기베르티가 새로운 기법들을 받아들이면서도 고딕 미술의 특징적인 이념들을 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피에솔레의 화가 프라 안젤리코도 종교 미술의 전통적 이념을 표시하는데 마사치오의 기법을 적용했다. 그가 1440년경 피렌체 산 마르코 수도원에 그린 프레스코들이다. 그의 그림은 원근법을 적용하면서도 성스러운 이야기들을 아름답고도 단순하게 그려냈다.

또 화가 파올로 우첼로가 그린 산 로마노의 대승‘은 피렌체의 역사적 에피소드를 그린 것인데, 피상적으로 보면 아주 중세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원근법에 깊이 매혹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그려진 것이 아니라 공간에 조각된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썼다. 땅에 쓰러진 전사를 표현한 방식은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쓰러진 전사는 다른 인물들에 비해 너무 작게 보이지만, 흥분을 불러일으키고 흩어진 병장기들은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렇게 두 세대의 장점을 아우르는 미술가들의 노력을 기쁘게 보았을 것이다.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큰 부귀를 떨쳤던 메디치 가문의 시내 궁전에도 프라 안젤리코의 제자 베노초 고촐리가 그린 동방 박사 세 사람의 모습이 당대의 흥겨운 생활 모습을 반영하여 아름 다운 풍경을 여행하는 장면으로 묘사되어 있다.

 

내용이 길어서 두번에 나누어 정리할까 합니다. 다음 글에 이어서 15세기 후반의 미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분명 읽었던 책인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 있는지..... 시험을 위한 공부가 이렇게 위험합니다. 원해서 공부할 때 비로소 눈에 들어오나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