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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16 – 15세기 북유럽(1)

by 즐거운담원 2022. 10. 6.

 

15세기는 미술사에 있어서 결정적이고 유의미한 변화가 있던 시기이다. 그 시대의 발견과 혁신은 이탈리아의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격상하게 하는 계기였을 뿐 아니라 유럽의 타 지역들과 차별되어 발전했기 때문이다.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의 차이는 건축에 있어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브루넬레스키가 그의 건축물에 고전적인 모티브를 사용하는 르네상스의 방법을 도입하며 고딕의 막을 내렸다면 이탈리아 밖의 미술가들은 한 세기 이후에야 이러한 추세를 따르기 시작했다. 15세기 전후반 내내 그들은 이전 세기의 고딕양식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고 첨형 아치나 공중 부벽과 같은 고딕의 전형적인 요소를 지켜왔지만 여기에도 변화는 있었다. 취향의 변화였다. 그들은 복잡한 격자무늬와 환상적 분위기의 장식을 더 강하게 선호하게 되었다. 플랑봐양(flamboyant), 즉 타오르는 불꽃모양이라는 뜻의 양식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마지막 단계를 보여주게 된 것이다. 설계자는 건물 전체를 할 수 있는 한 다양한 장식으로 뒤덮어 놓는다. 그 장식들은 기능성을 개의치 않았고 무한히 풍부한 창의성을 넘치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선택은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모두 소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영향이 없었더라도 새로운 경향이 시작될 수밖에 없는 한계까지 다가섰을 것이다.

 

특히 수직양식(perpendicular style)이라고 알려진 영국의 마지막 고딕 양식의 단계에서 이러한 경향들이 나타난다. 수직 양식이라는 명칭은 이전 시대의 장식적 양식, 곡선이나 아치보다는 직선을 보다 많이 사용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1446년 착공된 케임브리지 킹칼레지의 예배당이 좋은 예시다. 이 예배당은 그 이전 고딕 성당에 비해 형태가 간결하다. 측랑, 기둥, 가파른 아치가 생략되고 중세의 교회라기보다는 천장이 높은 방 같은 느낌으로 차분하고 지상적이다. 그러나 고딕 장인들은 그 간결해진 구조의 세부에 자신들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쳐 궁륭의 곡선과 직선의 교직을 환상적 솜씨로 보여준다.

 

 이탈리아를 제외한 나머지 유럽 국가들에서 회화와 조각은 이러한 건축의 발전과 어느 정도까지는 나란히 나아간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는 승승장구 하는 것과 달리 15세기의 북유럽은 아직 고딕의 전통을 지켜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미술은 여전히 과학의 문제이기보다는 관습과 관례의 문제로 여겨졌다. 수학적 원근법, 과학적 해부학, 로마 유적에 대한 연구 등등의 혁신도 북유럽 작가들은 동요하지 않았고 여전히 중세의 미술가들로 남아있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북유럽과 남유럽의 모든 미술가가 봉착한 난관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반 아이크는 꼼꼼한 관찰을 통해 화면을 채워가듯 세부를 거울처럼 묘사해나갔고, 또 다른 장가들은 이런 방법들을 보며 이에 전통적인 주제를 적용시켰던 것이다. 15세기 중엽 쾰른의 독일화가 쉬테판 로히너는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부를 만한 역할을 했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중세의 정신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지만 현실적인 공간감과 정확해진 소묘를 보여준다.

 

북유럽의 또 다른 화가들은 베노초 고촐리와 비견된다. 베노초 고촐리가 반영한 그렸던 부유한 귀족의 화려한 허식은 타피스트리를 디자인한 화가들과 값비싼 필사본을 장식한 화가들에게 적용되었다. 이런 작품들은 이전의 다를 바 없는 진부한 주제, 귀족들이 주문하는 헌정장면 같은 것이 많았는데 테마 자체를 구태의연하게 여긴 화가들은 이를 더 생생한 장면으로 만들기 위해 시민과 노점이 즐비한 당시의 중세도시를 실감 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 그림들은 마치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의 현세를 내세까지 가져가기 위해 세세하게 묘사하던 것처럼 충실하게 그려나갔지만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유머를 훌륭하게 곁들여냈다. 이탈리아에 비해 화면의 이상적 조화에 관심이 적었던 그들은 이러한 종류의 묘사들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이탈리아와 북유럽의 두가지 유파의 미술은 다른 방향이었지만 완전하게 분리된 채로 발전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화가 장 푸케는 젊은 시절 이탈리아로 여행을 했고 1447년에는 교황을 그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성 스테판과 같이 있는 프랑스 샤를르 7세의 재무대신인 에스티엔느 슈발리에‘의 초상화를 살펴보면 윌튼 이면화’와 마찬가지의 소재, 헌납자를 보호하는 성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이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불과 일세기도 지나지 않은 동안 미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준다. 푸케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처럼 빛을 사용하여 입체감을 만들어냈다. 조용하고 조각같은 인물들이 현실적인 공간에 서 있는 듯한 방식은 이탈리아 작품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물건의 질감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북유럽 전통의 영향을 지켜내고 있다.

 

로마를 여행했던 또 한 사람의 북유럽 미술가가 있다. 로지에 반 데르 바이덴이다. 그는 남 네덜란드에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고 한다. 그가 그린 제단화는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내리는 장면이다. 머리카락 한올한올, 세밀한 옷 주름 등 세부를 정밀하게 그려놓았지만 현실적인 모양새는 아니었다. 중립적인 배경을 등진 무대 위의 인물들처럼 배치된 인물들은 플라 이우 올로가 어려움을 겪었던 문제들을 현명하게 풀어나갔다. 만족스럽도록 실제적인 묘사와 자연스러울 수 없는 배경과의 조화를 무대 위의 배우들처럼 자리 잡게 하고 움직이게 하여 고딕 회화의 이념을 세우면서도 새롭고 박진감 넘치게 소화해내며 미술의 요구와 종교적 요구를 조화시켰다.

 

플랑드르 화가인 후고 반 데르 구스의 작업에서도 이러한 노력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말년에 수도원에 은거하며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이런 면모가 그림에도 드러난다. 얀 반 아이크의 평온한 그림과 달리 격렬하고 심각한 분위기가 담겨있다. 그가 그린 성모의 죽음‘에는 열 두 사도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슬픔이다. 성모의 임종을 앞에 두고 격정적인, 넋을 잃은, 조용에 생각해 잠긴 여러가지 슬픔을 열 두 사도의 얼굴에 담았다. 그의 그림에는 단축법과 같은 입체감의 문제와 씨름하지 않았음에도 감상자가 현실을 장면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쏟아낸 고민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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