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18- 16세기 초 토스카나, 로마(1) 브라만테

by 즐거운담원 2022. 10. 7.

 

 

16세기의 초엽은 이탈리아 미술에 있어서, 모든 시대를 통해서도 가장 위대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티치아노, 코렛지오, 지오르지오네, 북유럽의 뒤러와 홀바인 및 거장들이 넘치는 시대였다. 이 위대한 거장들이 어째서 같은 시대에 태어났던 걸까. 르네상스의 전성기로 불리는 이 위대한 시대의 어떤 조건이 이 천재들을 꽃피게 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오토가 등장했던 시대에, 그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고, 피렌체의 시의회는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은 지오토에게 도시의 성당 첨탑의 설계를 맡기려고 애썼다. 이처럼 도시들은 그들의 도시를 빛나게 꾸며줄 최고의 미술가들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이었으며, 이러한 경쟁은 서로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그러나 상업과 교류가 활발했던 이탈리아에 비해 자유를 누리기 어려웠고, 자신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깨어나지 않았던 북유럽은 그러한 자극이 없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는 미술가들이 원근법을 심도 있게 연구하기 위해 수학을 연구하고, 인체를 더 잘 알기 위해 해부학을 공부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런 시도들은 미술가의 시야를 넓혔고, 단지 주문품을 만드는 장인에 머무르지 않았다. 대자연의 신비를 탐험하고, 우주의 법칙을 탐구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독특한 거장이 될 수 없었다. 야심있는 미술가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지위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진 편견, 즉 두뇌로 일하는 시인은 우대하지만 손으로 작업하는 미술가를 낮추어 보는 시야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 이런 점에 분함을 느낀 미술가들은 보다 더 위대한 업적을 이루고 인정받아 그들이 단지 능력 있는 공방의 우두머리일 뿐 아니라 소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대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어려운 싸움이었다. 사회적 속물근성과 편견은 견고했다. 라틴어로 말하고, 능수능란한 화술을 구사하는 학자는 환영받았지만 화가나 조각가는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편견을 깨는데 도움이 된 것은 미술가들을 후원하는 자들의 명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들의 자신의 권위와 위신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된 군소 궁정들은 장엄하고 수려한 건축물이나, 호화로운 무덤을 꾸미거나, 엄청난 규모의 프레스코, 유명한 예배당의 제단에 그림을 헌납하는 등의 이름을 남길만한 일들에 집중을 했다. 많은 도시나 궁정에서는 이 일들을 진행할 능력 있고 저명한 미술가들을 초빙하려고 경쟁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미술가들은 주문을 받아들이며 조건을 걸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고용주의 눈치를 보며 작업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미술가들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건축의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가시화된다. 브루넬레스키의 시대 이후로 건축가는 고전학자에 버금갈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고대 건축을 비롯해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식 기둥과 엔타블라처의 올바른 비례 및 척법을 알고 있어야 했다. 고대의 유적들을 측정해 자료를 만들고, 그리스와 로마 건축가들의 관례를 책으로 만들었던 비트루비우스 등의 고전시대 저술가들의 원고를 탐구해야 했다. 학식을 갖춘 미술의 거장들은 신전이나 개선문과 같은 상징성 있고 장대하며 위엄 넘치는, 쓰임과는 관련이 없는 작품 같은 건축을 하는 것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의뢰받는 것은 도시의 궁궐이나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었다. 랜드마크가 될 만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게 할 유력한 후원자가 등장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기념할 만한 일이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가 매장된 자리 위에 세웠던 전통적이며 고색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허물고 새로운 성당의 건축을 결정한 것이 바로 그런 순간이다. 이 업적을 맡은 사람이 바로 도나토 브라만테였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의 건축을 살펴보면 그가 노예적인 모방자가 되지 않으면서 얼마나 고전 건축의 이상과 기준을 흡수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작은 신전으로 이야기했던 예배당은 작은 정자의 형태로 도리아식의 열주를 두르고 경쾌함과 우아함으로 고전적 작품스러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교황은 도나토 브라만테에게 새로운 성 베드로 교회당의 설계를 의뢰했는데, 일천 년 서유럽 전통을 무시하고 놀랍고 새로운 자랑거리로 만들고자 불타올랐던 것 같다. 서유럽 전통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교회당은 신자들이 미사가 집전되는 제단을 동쪽으로 바라보도록 배치되는 타원형 구조의 홀인 것이 관례였지만, 브라만테는 규칙성과 조화를 추구하며 거대한 십자형의 홀 주위에 대칭형으로 예배실들을 가진 장방형의 교회당을 설계했다. 이 홀은 대형 아치 위에 거대한 원개를 씌우도록 했는데, 브라만테는 콜로세움의 효과를 판테온신전의 효과와 결합시키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 베드로 교회당 건설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할 운명이었다. 너무나 많은 돈이 필요했던 이 계획을 위해 교황은 건축 기금을 무리하게 재촉했고, 이것은 종교 개혁으로 가는 지름길이 되었다. 교황은 기부금을 받고 면죄부를 판매했고, 독일의 루터는 이에 공개 항의를 제기했다. 교회 안에서도 결국 건축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건축 공사가 상당히 진전했을 무렵에는 원형의 구조를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 성 베드로 교회당은 거창한 규모를 제외하고는 브라만테의 계획과는 다르게 지어지게 되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브라만테의 이 원대한 건축 계획과 같은 대담한 진취적 기상은 1500년경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의 특징이다. 이들은 불가능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것이 바로 불가능해보이는 것을 이루어내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이 위대한 시대의 대표적 거장들을 배출한 도시는 피렌체였다. 1300년대 지오토, 1400년대 마사치오 이래로 피렌체의 미술가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들의 전통을 키워왔고 그 업적은 인정을 받았다. 모든 미술가는 이렇게 확립된 전통으로부터 성장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되고 또한 알려지지 않은 거장들의 업적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천재 거장들이 그들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