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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술사

서양 미술사 21- 16세기 초 토스카나, 로마(4) 라파엘로 산치오

by 즐거운담원 2022. 10. 10.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경쟁을 하고 있던 시절, 움브리아 지방,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온 젊은 미술가가 있었다. 라파엘로 산티다. 피렌체로 오기 전 움브리아 파 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의 제작소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던 그는 이미 장래가 촉망되는 작품들을 제작할 역량이 있었다. 페루지노는 감미롭고 경건한 화풍의 제단화를 통해 명성을 얻은 거장들 중 한 사람이었고,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몇 개에서는 레오나르도의 스푸마토를 구사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 속의 인물들은 조화 있는 구도를 이루는 가운데 적절히 배치되어 있고 제각기 조용하고 편안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조화를 얻기 위해서 페루지노는 그 시기의 거장들이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정밀한 묘사들을 포기했다. 페루지노가 그린 천사들은 새롭고 창의적인 그만의 유형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라파엘로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며 스승의 화풍을 배우고 흡수했다. 피렌체에 라파엘로가 도착했을 때 그보다 서른한 살 위의 레오나르도와 여덟 살 위의 미켈란젤로가 이전에 꿈꾸지 못했던 새로운 미술의 기준을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 떨리는 도전에 부딪힌다. 그는 레오나르도와 같은 광범위한 지식도 없었고, 미켈란젤로처럼 권력을 지니지도 못했지만, 두 천재가 가지지 못했던 점, 일반 사람들과 잘 지내는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기술을 배우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후원자와의 좋은 관계를 얻을 수 있었기에 두 천재 거장과 비슷한 경지에 오를 때까지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작품들에는 불필요한 힘이 들어있지 않고, 감미롭고 부드럽다. 이 편안함과 자연스러움은 너무나 당연스러운 느낌도 있어서 어딘가 뻔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이 그림들의 외견상의 평이함은 깊은 사색과 세심한 계획, 엄청난 기술적 지혜의 결과물이다. 라파엘로의 대공의 성모와 같은 그림은 여러 시대에 걸쳐 완전함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왔다는 점에 있어서 고전적이기도 하고 페루지노의 인물들이 가지는 조용한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스승의 어딘가 공허한 느낌의 규칙성과 그의 충만한 생명감 사이에는 커다란 격차가 있다 그가 그려낸 뻔해 보일 만큼의 편안함은 아주 작은 디테일이 바뀌어도 깨지고 말 것이다. 애초부터 이런 상태로 존재해 왔던 것 같은 느낌으로.
몇 년 후 라파엘로는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데 이것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에 착수했을 무렵인 1508년 경이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이 젊고 붙임성 있는 화가에게 바티칸 궁 안의 스탄체라고 알려진 방들의 벽면을 장식하는 일을 맡겼고, 그는 방들의 벽과 천장의 프레스코를 완벽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껴보려면 방안에 한참 머물러 직접 느껴 보아야 한다. 방안의 프레스코 안의 인물들은 등신대로 그려져 움직임이 다른 움직임에 호응하고, 하나의 형태가 또 다른 형태에 화답하는 생명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등신대가 아닌 작은 그림에서도 라파엘로는 어떠한 장면도 불안정하거나 균형을 잃은 것으로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화면 전체에 끊임없는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인물을 배치하는 탁월한 솜씨, 더할 나위 없이 교묘한 구도를 펼쳐나가는 능력은 두 천재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인정을 받았던 거이다.
라파엘로의 작품에는 지금까지도 감탄해 마지않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인물들의 순수한 아름다움이다. 갈라테아 를 완성했을 때, 그 그림을 본 어느 귀족은 이 아름다운 그림의 모델이 누구인지를 물었지만, 라파엘로의 그림에는 모델이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 떠오른 어떤 이념을 따랐다고 대답했으니까. 스스로가 상상한 미의 전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프락시 텔레스의 시대를 돌이켜보면 도식적인 형태가 점차 자연을 닮아가는데서부터 어떻게 우리가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이르는 것이 생겨났는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역전되었다. 미술가들은 고전의 조각들을 보고 머릿속에 형성한 아름다움이 기준에 자연을 이끌어 가려고 했던 것이다. 즉, 모델을 이상화 했던 것이다. 그런 경향은 꽤 큰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 미술가가 의도적으로 자연을 개선하려고 하면 그 작품은 틀에 박히거나 생기를 잃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작품 안에서는 생명감과 성실성을 잃어버리지 않은 이상화 작업을 찾아볼 수 있다. 갈라테아의 사랑스러움에는 도식적이거나 계산적인 구석이 없다. 갈라테아는 사랑과 미의 찬란한 세계, 즉 16세기 이탈리아 사람들이 꿈꾸었던 고전 세계에서 사는 요정이었다.
라파엘로는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지만, 짧은 일생 동안 놀랄 만큼 다채로운 예술적인 탐구와 업적을 남겼다. 미켈란젤로처럼 건축물을 설계하고, 로마의 유적을 조사했다. 위대한 벽화가 이며 위대한 초상화가였던 라파엘로는 친화력이 훌륭한 사람이었기에 교황청의 고과들과 학자들은 그의 친구가 되었고 그를 추기경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야기마저 나왔다. 1520년 그가 사망하고 로마의 판테온에 잠들었다. 그의 묘비에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벰보 추기경은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남긴다.

여기는 라파엘로의 무덤이니 생전에 그는 어머니인 자연을 그에게 정복되지나 않을까하여 무서워 떨게 만들었다. 이제 그가 죽었으니 자연 또한 죽을까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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