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스승은 조각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로 피렌체의 유명 제작소의 우두머리였다. 베로키오는 당시 굉장한 명성을 누리고 있었고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장군의 기념비를 맡아 제작했는데, 이 기마상은 그가 도나텔로의 전통을 이어받았음을 보여준다. 조각된 말의 근육과 혈관은 해부학에 대한 조예를 드러내고, 기수는 오연한 표정으로 부대를 이끈다.
이러한 걸작을 만들어 내는 제작소에서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분명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주물 공작과 금속 공예의 기술을 배웠을 것이고 모델들을 보며 회화와 조각을, 사물을 탐구하는 법을, 원근법과 색채학 등 철저한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베로키오의 제자들 중 걸출한 미술가가 다수 배출되었지만, 그는 천재였다.
만능이라고 말할 수 있을 법한 그의 지성은 지금까지도 경탄과 존경의 대상이다. 그의 제자와 추종자들이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유품, 글과 소묘들, 책을 읽다가 발췌해 적어 놓은 구절들, 구상중이었던 책의 초안 등등을 정성스레 보존했는데, 한 인간이 각기 상이한 모든 분야에 걸쳐 어떻게 이렇게 걸출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미술가라면 이전 시대 선배들이 해온 것처럼 시각 세계를 탐구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들을 능가했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학자들이 자신감의 근거로 내세우는 책을 통한 지식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위대한 극작가 셰익스피어와 마찬가지로 라틴어는 거의 모르고 그리스어에는 장님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학자들이 우러러 보는 고대 저술가들의 문헌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만을 믿었다.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권위자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실험을 하고 해결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모든 것에 도전했다. 인체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30구 이상의 사체를 해부했고, 자궁 속에서 태아가 자라나는 신비를 해명하려 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파도와 조류의 법칙을 관찰하고 비상하는 곤충이나 생의 움직임을 분석함으로써 비행 기구를 고안하기도 했으며, 암석과 구름의 형태, 식물의 성장 법칙, 음악의 조화 등 그의 궁금증에는 끝이 없었고 모든 것이 탐구의 대상이 되고 예술의 재료가 되었다. 그는 성채와 운하를 건설하는 건축가였고, 새로운 무기를 만드는 발명가이며, 무대 공연과 야외 연극에 효과를 주는 기계장치를 만들어 재미를 주는 연출가, 위대한 미술가, 놀라운 음악가로 존경받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저서 출판을 하지 않았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글씨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나갔기 때문에 그의 기록들은 거울에 비춰보아야 읽을 수 있다.
그의 글 가운데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Il sole non si move)’라고라고 쓰인 구절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지만 그는 대중들에게 과학자로 보이고 싶은 욕망을 지니지 않았을 가능성도 크고 탐구해야 할 신비한 대상이 너무나 많았던 탓에 어떠한 결론에 도달한 대상에 대해선 흥미를 잃고 다른 탐구 대상을 찾았던 것 같다. 그에게 모든 탐구활동은 그의 미술에 필요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그는 회화를 과학적 토대 위에 올려 놓음으로써 존경받는 예술로 위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등장하는 가구쟁이 스넉, 직공 버텀, 땜쟁이 스누트가 어떠한 일들을 떠맡았는지 생각한다면 당시 화가를 비롯한 미술가들의 대우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문학(수사학, 문법, 철학, 변증법)과 손을 써서 하는 비천한 종류의 작업들을 구분했고, 이것이 고전시대의 속물주의의 근거가 된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회화가 일종의 자유 문예와 같고 육체노동 역시 시를 적을 때 손을 쓰는 노고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이러한 그의 경향은 후원자들과의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작품 중 완성된 작품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는 후원자가 아무리 애를 태워도 본인이 이제 됐다고 여길 때까지 작품을 내놓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의 원숙기에 완성했던 몇 점 되지 않는 작품들은 애석하게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지 않은 상태로 전해져 남았다. 그 유명한 ‘최후의 만찬’의 잔영을 볼 때 우리는 지금 남아 있는 그대로 그 작품을 볼 것이 아니라 당시의 수도사들이 이 그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지를 떠올려보아야 한다.밀라노 산타마리아 텔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 벽 위에 그려진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수도사들이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 보자. 성경의 이야기는 아주 가깝고 실감 나게 그려져 있다.수도사들이 식사를 하는 식탁과 나란히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만찬이 펼쳐지는 식탁이 보이고 식탁보 위의 접시와 인물들의 옷자락은 박진감 넘치게 현실적이다. 이 모든 것을 비추는 빛은 얼마나 확실한 입체감을 주는가. 이 작품은 같은 주제를 그렸던 이전의 작품들과 유사성이 전혀 없다. 조용히 성찬을 나누는 그리스도와 제자들, 그리고 떨어져 있는 유다를 그린 이전의 작품들에는 없는 드라마와 흥분이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라는 예수의 말에 동요를 일으키는 사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누군가는 손짓을,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뒤로 움츠리고, 또 누군가는 애정과 결백을 보이려는 듯하고, 누군가는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오직 유다만이 손짓도 의문도 없이 앞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고 의심인지 분노 일지 모를 눈빛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동요로 술렁이는 제자들의 가운데 조용히 앉아있는 예수와 유다는 대조를 이룬다. 모든 인물의 제스처는 서로 연결되어 자연스럽고, 혼란이 휩쓴 장면을 그린 그림에는 혼란한 구석이 전혀 없다. 전대의 거장들이 사실성의 요구와 디자인의 요구를 조화롭게 구사하는데 느꼈던 어려움을 레오나르도는 쉽게 해결했다. 그러나 이 뛰어난 구성과 아름다운 소묘의 솜씨 같은 기법적인 문제를 차치하더라고 이 그림은 너무나 놀랍다. 레오나르도가 발휘한 인간의 반응과 행동에 대한 통찰력은 너무나 놀라운 것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의 과정에서 종종 레오나르도는 그저 작업대에 서서 하루종일 서서 생각하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또 하나의 유명작 ‘모나리자’를 살펴보자. 피렌체의 ‘리자’라는 부인의 초상이다. 이 그림은 너무나 많이 알려져서 광고나 포스터 엽서 등, 상업적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지만, 우리는 이 그림을 처음 보는 것처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나리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속의 모나리자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과 같다. 그녀의 미소는 슬픈 듯도 비웃는 듯 미묘하다. 이러한 효과를 설명하려면 레오나르도가 창안한 ‘스푸마토’가 답이다. 스푸마토란 한 형태와 다른 형태가 서로 스며들어가는 듯, 색깔 사이의 윤곽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도록 처리하는 명암법이다. 모나리자의 눈꼬리와 입가는 두 가지 표정의 윤곽을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 그림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인물의 양쪽 배경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 오른쪽의 지평선과 왼쪽의 지평선의 높이가 다르다. 우리가 왼쪽에서 그림을 보면 그녀는 키가 크거나 몸을 더 일으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점의 변화에 따라 그녀는 다르게 보인다. 얼굴의 양쪽 부분 조차 완전히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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