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빛낸 또 한 명의 거장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그 역시 피렌체의 미술가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다 23년이나 젊었고, 레오나르도가 죽고 난 40년 후에 사망했기에 미술가의 지위가 변화하는 과정들을 다 지켜보았고, 이에 이바지하기도 했다.
15세기 말엽의 피렌체의 거장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 3년간 도제 수업을 받았다. 기를란다요의 그림은 당시의 화려하고 다채로운 생활을 흥미 있게 반영하는 작품들을 남긴 화가다. 성서의 이야기에 자신의 후원자인 메디치 가문을 치환시켜 방금 벌어졌던 사건인 듯 표현하기도 했다. 산타마리아 노벨라 교회당 벽화 ‘성모의 탄생’은 성처녀 마리아의 탄생을 묘사한 작품인데, 배경이 되는 저택과 등장하는 상류사회 부인들의 모습은 15세기 말에 유행하던 양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기를란다요의 제작소에서 젊었던 미켈란젤로는 모든 기법적 트릭과 프레스코의 테크닉, 소묘의 기초를 철저하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 유명한 제작소의 능력 있는 제자로 그치고 싶지 않았다. 기를란다요의 방식을 안이하게 배우기보다는 밖으로 나와 지오토, 마사치오, 도나텔로 등 당시 거장들의 작품과 메디치 가문의 소장품인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을 연구했다. 근육과 인대로 움직이는 인체를 아름답게 묘사해내는 고대 조각가들의 비법을 통찰하려고 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마찬가지로 인체 해부학을 공부하고 사체를 해부하며 모델을 보고 소묘했다. 그는 끈질긴 외골수처럼 인체에 대해 낱낱이 파헤쳐 나갔고 인체를 소묘하는 데 있어 어떤 자세도 운동도 그려낼 수 있었다. 서른 즈음 그는 일반으로부터 레오나르도와 비견되는 천재 거장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피렌체 시는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 회의실 한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 이야기를 그려줄 것을 의뢰했다. 이 두 천재가 경쟁하게 되고, 이것은 세기의 관심거리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작품들은 완성되지 못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에게 로마에 자신의 묘비를 세워주기를 원했고, 당시 미술가의 원대한 포부를 발휘할 수 있을 계획에 매혹된 미켈란젤로는 대리석 채석장으로 달려가 거대한 영묘를 조각하기 위한 재료를 수집하며 반년 이상을 보냈다. 무수한 대리석을 고르고 수집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온갖 이미지들이 떠올랐고 로마로 돌아와 작업에 착수한 지 얼마 안 되어 이 원대한 계획에 대한 교황의 흥미가 이미 식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가 작업할 묘소는 성 베드로 성당의 옛 건물에 세워지기로 되어 있었는데, 브라만테의 성 베드로 성당의 신축 계획과 상충되는 것이었다. 커다란 실망과 더불어 브라만테가 그를 독살하려 한다는 두려움에 그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도망하여 교황에게 편지를 쓴다. 그가 필요하다면 직접 와서 찾으라고.
편지를 받은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역정을 내지 않고 오히려 그가 돌아올 수 있도록 피렌체의 지도자들과 교섭을 시작했다. 이 미술가의 거취는 국가의 미묘한 문제나 정치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피렌체의 지도자는 미켈란젤로를 설득하고 그를 위한 추천장까지 써주었다.
로마로 돌아온 미켈란젤로는 교황이 맡긴 다른 작업에 착수한다.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지어놓은 시스티나 예배당의 궁륭형 천정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에는 보티첼리, 기를란다요 등등의 거장들의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으나 궁륭형 천정이 비어있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이 험난한 작업을 떠맡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교황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예배당 안에 혼자 틀어박혀 홀로 작업했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을 단신으로 실행에 옮겼다.
4년이었다. 시스티나 예배당 안에 세워놓은 받침대 위에서 천정으로 고개를 향한 채 외로운 작업을 이어갔던 것은. 그 거대한 공간을 홀로 그림으로 덮어 나갔던 육체적인 고충은 놀라운 것이지만 그것은 미켈란젤로의 정신적 예술적 업적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전에 찾아볼 수 없는 창의성과 빈틈없는 솜씨, 그리고 그것마저 능가하는 장대한 시각 세계는 인류에게 새로운 관념을 심어주었다.
이전의 화가들이 전통적인 기법으로 성서의 이야기를 줄지어 나간 그 위, 천정에 펼쳐진 별세계는 인간적 차원은 넘어선 듯하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전설의 무녀들, 남자와 여자들의 그림이 줄 양쪽으로 줄을 지어 등신대 이상으로 크게 그린 그림들 가운데, 천정 복판에는 노아의 이야기를 그려놓았다. 그림들 사이의 경계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아름다움을 지닌 채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 어마어마한 수의 인물들은 조화롭게 배치되고 부드럽고 풍부하며 절제된 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명확한 짜임새를 갖추고 있다. 그 인물들의 다양함은 그 어떤 자세나 각도에의 인체라도 그려내는 미켈란젤로의 능력을 여실 없이 보여준다. 시스티나의 천정화를 그리는 미켈란젤로의 머릿속에는 아마도 실현하지 못했던 대리석상들의 구상들이 여전히 남아있었을 것이다.
‘아담의 창조’에서 젊은 아담의 육체에 불어넣어 지는 생명력과 조각상 ‘빈사의 노예’에서 꺼져가는 생명력은 매우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육체가 죽음의 지배를 받아들이며 투쟁과 긴장으로부터 벗어나는 마지막 순간, 노예의 체념의 제스처는 말로 이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차가운 대리석의 조각은 살아있는 듯하기도 하고 고요하게 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아무리 격렬하게 뒤틀린 자세를 하고 있어도 아주 안정감이 느껴진다. 미켈란젤로는 그가 고른 재료가 원래 인물상들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조각가로서의 그는 그들을 가리고 덮은 여분의 돌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시스티나의 천정화를 완성한 이후에는 이미 알려졌던 그의 명성을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그것은 일종의 저주가 되고 말았다. 꿈이었던 율리우스 2세의 묘비를 완성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고 왕후며 교황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대가를 지불하고 일을 맡기려고 아우성을 쳤다.
지쳐가고 나이 들어가는 거장은 내면으로 은거하기 시작했고, 그의 미술이 죄스러운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에 고통을 받았다. 그는 조각가나 화가로서의 호칭을 거부했고, 매우 강한 독립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최후에 맡았던 작업에 대해서는 보수를 거절했다. 이 미술가는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신에 대한 위대한 봉사라고 간주하여 세속의 이익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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