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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미술사

서양미술사 24_16세기 초 독일2_마티아스 그뤼네발트

by 즐거운담원 2022. 12. 28.

뒤러와 비견될 만한 또 다른 독일 위대한 화가 마티아스 그뤼네발트가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17세기의 한 작가가 그를 독일의 코레지오라고 찬탄하며 언급했는데, 그 시대의 어떤 기록에도 그뤼네발트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다. 동일 작가의 그림으로 보이는 작품들의 일부에 M.G.N.이라는 약자가 적혀 있다는 점과 그림을 화풍으로 마티스 고타르트 니타르트라는 화가와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그러나 마티스라는 거장에 대해서도 많이 알려진 바가 없어서 수수께끼의 신비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의 얼마 안 되는 작품은 크고 작은 지방 교회들의 제단화들이며 그 그림들은 전통적인 형식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서는 뒤러와 같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매진한 노력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종교미술의 전통을 벗어나야할 속박으로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새로운 발견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한도 내에서 그 기술들을 활용했다. 그는 숨겨져 있는 미의 법칙들을 탐구하고 찾아나가기보다는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인 종교미술의 목적, 즉 설교와 종교적 진리 선언에 있었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

그의 그림 <이젠하임의 제단화>를 살펴보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은 뻣뻣하고 상처에 뒤덮여 이탈리아 미술가들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뤼네발트는 예수가 받고 있는 고통을 전하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그리스도의 몸은 십자가의 고통으로 뒤틀려 있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온몸을 유린한다. 검붉은 피와 녹빛으로 질린 피부가 대조를 이룬다. 표정과 손끝에도 고통이 여실히 드러난다. 과부의 차림으로 혼절하는 성모마리아를 복음자 성 요한이 부축하고, 향유를 옆에 둔 막달라 마리아는 두 손을 맞잡고 절규한다. 십자가의 반대편에는 세례자 요한과 십자가를 매고 성찬배에 피를 쏟는 어린양이 그려져 있다.

 

제단에서 이 그림을 마주한 사람들에게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는 아주 직접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뤼네발트는 무섭고 잔인한 장면을 어떤 여과나 완충없이 현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묘사에는 실물과는 다른 왜곡들이 존재한다. 막달라 마리아의 작은 손에 비해 그리스도의 손은 부자연스러울 만큼 크다.  이는 이집트 미술에서 볼 수 있었던 중요도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는 원시 미술의 법칙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효과적으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아름다운 조화를 배제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확한 비례를 표현하는 새로운 요구들도 외면한 것이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제단화 중 부활장면

그뤼네발트는 진보적 입장을 갖지 않더라도 위대한 미술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작가다. 그뤼네발트는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될 때는 어떤 방법이든 채택했다. 그리스도의 부활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빛을 표현한 색채를 보자. 부활한 예수는 찬란한 빛에 휩싸여있고 몸을 감싼 수의는 그 빛을 극적으로 반사한다. 공중으로 떠오른 그 모습과 대조적으로 땅 위에 압도되어 쓰러진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갑옷으로 무장을 했음에도 무기력하기 그지없다. 망가진 인형처럼 구르고 있는 그들의 위로 떠오르는 고요하고 장엄한 그리스도의 모습은 평온함에도 힘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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