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의 화가로서 이런 방식을 가장 심도 있게 추진해 나간 화가는 도메니코 테오토코풀로스라는 크레타 출신의 화가이다. 이 길고 어려운 이름의 화가는 우리에게 희랍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출신지는 중세 이래로 새로운 미술이 전혀 발전하지 않았던 외딴 지역이었기에 딱딱하고 엄숙하게 그려진, 실제 모습과는 거리가 먼 성상들, 즉 고대 비잔틴 양식을 익히 보아왔다. 본인도 그림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도록 훈련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베네치아로 와서 마무리가 거칠고 극단적인 단축법으로 왜곡된 틴토레토의 작품들을 보고도 별다른 반감을 가지기보다는 매혹을 느꼈다. 엘 그레코 역시 틴토레토와 마찬가지로 격정적이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서의 이야기들을 참신하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베네치아에 한참 머물렀다가 그는 스페인의 외딴 도시 톨레도에 정착했다. 톨레도의 사람들은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묘사를 요구하며 지적해 대는 귀찮은 비평가와 다른,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중세적 관념이 사라지지 않은 지역의 사람들이었기에 마음 편하게 자신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쓰기보다는 감동적이고 극적인 장면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를 능가했다.
그의 그림 <묵시록의 다섯 번째 봉인>을 보자. 놀랍도록 열정적인 그림이다. '어린양이 다섯째 봉인을 뜯으셨을 때, 나는 하느님의 말씀과 자기들이 한 증언 때문에 살해된 이들의 영혼이 제단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거룩하시고 참되신 주님, 저희가 흘린 피에 대하여 땅의 주민들을 심판하고 복수하시는 것을 언제까지 미루시렵니까?" 그러자 그들 각자에게 희고 긴 겉옷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처럼 죽임을 당할 동료 종들과 형제들의 수가 찰 때까지 조금 더 쉬고 있으라는 분부를 받았습니다.' (요한묵시록 6장 9-11절) 이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다. 왼쪽 귀퉁이의 성 요한은 천국을 바라보며 황홀경에 빠져 팔을 쳐들고 있다. 나체의 인물들은 무덤에서 일어나 하느님께 억울함을 호소하며 흰 옷을 받으려고 손을 뻗은 순교자들이다. 최후의 심판일의 공포스러운 광경을 매우 박진감있게 표현했다.
틴토레토의 한쪽으로 치우친 비정통적 구성방법, 파르미지아니노의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의 방법을 그가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나 그가 이러한 기법들을 사용한 이유가 새로운 목적을 위한 것이었음 또한 알 수 있다. 스페인은 신비스런 종교적 열정의 나라로 믿기 힘들 만큼 현대적인 엘 그레코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았고, 그의 작업실은 항상 주문으로 북적였다. 때문에 여러 명의 조수를 고용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의 서명이 있는 작품들의 완성도가 들쑥날쑥한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세대가 미처 다 지나가기도 전에 그의 작품 속 부자연스러운 형태와 색채에 대한 비판과 조소가 시작되었다. 현대미술은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러한 자유로움과 다양성에 관한 이해가 정립되는데는 매우 긴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미술가보다 더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 남유럽의 화가들은 단지 참신하고 획기적인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대한 고민만 하면 되었지만, 종교 개혁이 일어나고 많은 개신교 신자들이 구교의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취지로 예배당의 그림이나 조각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래서 신교권의 화가들은 제단화를 그리는 일거리, 즉 가장 큰 수입원을 잃게 되었다. 칼빈교의 신자들은 금욕적인 신앙을 추구했기 때문에 집안을 장식하는 것마저 사치로 여겼기에 일거리는 더 줄어들었다. 궁전이나 귀족의 저택에 그렸던 대규모의 프레스코작업은 더 이상 그릴 일이 없었다. 책의 삽화와 초상화 정도가 그림 주문의 전부였고 당시의 화가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독일 화가 한스 홀바인의 생애를 보면 당시의 북유럽 미술의 위기가 미술가에세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와 교역관계에 있던 부유한 상업도시 아우크스부르크 출신으로 학문의 중심지인 바젤에 갔다. 그는 화가 집안 출신인 데다가 꽤 눈치 있고 약삭빠른 사람이어서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의 성과를 금방 흡수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서른 살 즈음 바젤 시장의 가문 이름으로 바치는 제단화 <성모와 마이어 시장 일가>를 그렸는데, 이 그림은 아주 전통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은 이전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이 그림은 그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된다. 고전적 형태의 감실로 감싸진 가운데 품위 있고 고용하게 자리 잡은 성모와 그 양쪽으로 자연스럽게 배치된 헌납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배치법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미술가와 지오반니 밸리니, 라파엘로의 작품과 같은 조화를 느낄 수 있다.
독일어 사용권의 국가에서 화가로서의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개혁의 여파로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기에 위대한 학자 에라스무스의 추천서를 가지고 스위스를 떠나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 추천서는 '이곳의 미술은 얼어붙고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영국에 도착하여 그리게 된 첫 그림은 토마스 무어의 가족들의 초상화들이었는데, 이 작업을 위한 습작 몇 점은 지금도 윈저궁에 보존되어 있다. 이 그름은 토마스 무어의 며느리인 <앤 크레사커의 초상>이다.
그는 더이상 성모상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영국에 정착하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의 직책을 받게 되어 일할 수 있는 터전을 얻게 되었다. 당시의 궁정 화가는 그림뿐 아니라 보석, 가구, 실내장식, 연극 의상, 무기, 술잔과 같은 식기의 디자인 등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일이었지만 기본적 직무는 왕실 구성원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었기에 홀바인은 통찰력을 발휘하여 그 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남겨주었다.
그가 그린 다른 초상화 <노포크 공장 토마스 하워드>는 헨리의 다섯번째 왕비였던 캐서린 하워드의 삼촌인데, 극적인 요소 없이 담담하게 그려진 초상화임에도 불구하고 보면 볼수록 주인공이 어떤 성정을 지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홀바인은 비위를 맞추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본래의 토마스 하워드를 충실하게 그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모든 구성이 완벽히 균형을 이루고 있는 빈틈없는 솜씨를 볼 수 있다. 초반의 작품들에서는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 디테일을 묘사하는 재주를 과시하려고 했었지만, 나이를 먹고 원숙해지며 그러한 집착이나 트릭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그림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거장다운 자기 조절 능력은 그가 거장임을 증명한다.
이렇듯 홀바인이 떠나버린 북유럽, 특히 독일어권 국가들의 회화는 급속도로 쇠퇴했고, 홀바인이 사망하고 난 후에는 영국의 미술도 같은 길을 걸었다. 사실상 영국의 회화 분야 중에 종교개혁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홀바인이 바탕을 다져놓은 초상화뿐이었다. 그리고 점차 유입되는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은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 귀족적 세련과 우아함을 이상적인 것으로 여겼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그림 <장미꽃 사이의 젊은 신사>는 그러한 추세를 그대로 반영한다. 시드니와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니콜라스 힐리어드의 작품이다. 장미꽃 넝쿨 사이에서 오른손을 가슴에 얹고 나른하게 나무에 기댄 말쑥한 청년은 시드니의 전원시나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의 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림에는 라틴어로 '고귀한 사랑이 괴로움을 가져온다'라는 문구가 적혀있다. 아마도 이 그림의 주인공인 청년은 사랑하는 여성에게 보내려고 이 그림을 주문한 듯한데, 이 시대의 유행에 민감한 젊은 멋쟁이라면 슬픔과 짝사랑에 빠진 문위 기를 내는 것이 추세였기에 이렇게 표현된 한숨과 서글픔은 사실 심각하고 괴로운 것이 아닌 세련되게 포장된 장난스러운 유희였다.
힐리어드의 세밀화들이 그런 유희를 위해 그려진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이 그림이 가식적이고 기교적은 놀랄 일도 아니다. 그저 값진 포장 상사에 담긴 그림 속의 멋지고 우아하지만 사랑에 아파하는 멋진 청년의 모습을 본 아가씨가 그이의 안타깝고 애처로운 사랑에 응답해주기를 함께 응원해 주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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